배달의 기수, 강필중배달의 기수, 강필중
Posted at 2012/02/17 16:52 | Posted in 잡글들/소설1.
그 날은 유난히 일이 적어서, 택배기사 강필중씨는 평소보다 일찍 본래 담당 구역을 다 돌고 부탁받은 잔무에 착수할 수 있었다. 아내가 아프다며 조퇴한 동료기사 박씨가 담당하는 택배들이었다. 갑작스런 부탁에 터미널까지 돌아가서 상차까지 끝낸 짐들을 도로 옮겨 싣느라 대낮부터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른다. 그는 땀을 닦으며 무심코 핸드폰을 열고 첫 택배 수취인의 전화번호를 찍어 넣다가 자기도 모르게 동작을 멈췄다. 핸드폰 액정에 새겨진 번호의 모양새가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 눈에 익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강필중씨는 머지않아 해답을 찾아냈는데, 그 해답이란 것이 전혀 엉뚱한 기억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에 자동차에 올라타는 일도 잊은 채 잠시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트럭에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6년 전에 헤어진 마지막 애인의 전화번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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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강필중씨도 언젠가 이런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모를 우연을 막기 위해 그는 되도록 그녀와 마주칠 지도 모르는 동네 인근에는 발을 붙이지 않았다. 처음엔 몇몇 특정 동네만 피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특별한 땅에 서린 추억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사람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지난 6년간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옮겼으며 직장을 잡았다. 이따금 원치 않게 그녀의 흔적을 발견하거나 주변에서 전해들을 때마다 서울에는 강필중씨가 발 디딜 수 없는 땅이 늘어갔다. 그저 버스나 전철 창밖에 그려진 풍경, 금지된 땅.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따금 피치 못하게 금지된 땅에 들어서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단 한 모금 들이쉰 공기에서도 행복하거나 씁쓸했던 추억들이 바이러스처럼 자라나 온 몸을 파고들었다. 이별의 기억과 맞물려 기괴하게 오염되고 변형된 추억들. 그렇게 오염된 추억과 다시 마주한 날이면, 강필중씨는 몇 날이 지나도록 갖은 후회와 원망에 사로잡힌 채 좀처럼 헤어 나오질 못하는 것이었다. 오염된 추억을 회피하는 일은 흡사 급격히 번지는 전염병을 피해 도망가는 작업과도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과거의 망령에서 안전한 곳은 점점 줄어들었다. 멀리서 사례를 찾을 것도 없이 결근한 동료가 담당하는 동네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도 안전지역이었던 것이다.
강필중씨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분명히 언젠가는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됐든,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은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저 지워버려야만 하는 기억, 돌이킬 수 없는 심리적 내상일 뿐이었다.
택배 수신처에는 그녀의 이름 대신 ○○대학교 부속 연구소 이름만 적혀 있었다. 발신처는 외국이었다. 아마도 연구소 일로 발송된 물건인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는 이곳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번호를 바꿨을 수도 있으니까. 사실 처음 헤어졌던 날, 강필중씨도 당장 전화번호부터 바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미련이 그를 붙잡았다. 결국 핸드폰이 네 번 바뀔 동안 번호만은 바뀌지 않은 채, 헤어졌던 그 날 그대로 남게 되었다. 과연 그녀는 어땠을까. 당장 전화만 걸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너무나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과거의 흔적이 문득 강필중씨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6년간 연애했다. 하지만 알고 지낸 것은 훨씬 오래된 일이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단순한 친구와 엄밀한 애인의 경계는 다가올 스무 살의 또렷한 정의만큼 분명하지 못했다. 강필중씨는 그저 고 1인지, 고 2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어느 해의 가을에 그 경계가 무너졌다고만 기억한다. 때문에 그녀가 첫 키스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 물었을 때에도 그렇게 어중간하게 대답하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실망할 만한 대답을 들은 그녀는 그렇다면 그냥 지금 하는 걸 첫 키스로 삼자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재수생, 그녀가 의대 초년생이었던 해, 어느 초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강필중씨는 이 날 낮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그녀의 어머니를 업고 병원까지 전력으로 달렸던 참이다. 덕택에 그녀의 어머니는 살아났고, 그들은 눈물과 환희와 키스가 섞인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부터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강필중씨는 공부를 싫어했다. 그리고 가난했다. 조금은 멍청하기도 했다. 그저 체력만은 남보다 좋은 편이었다. 사실 이 모든 게 합쳐졌으니, 대낮부터 술 먹다가 집에 돌아오던 재수생이 장보고 돌아오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쓰러지는 걸 우연히 목격하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었던 탓에 무려 십오 분 동안 그 사람을 업고 병원까지 달려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어머니는 정신을 차린 뒤 강필중씨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도, 강필중씨 본인도 둘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여자의 집안은 어마어마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넓은 자기 집에 지내며, 살림도 남부럽지 않은 편이었다. 반면 강필중씨는 여자의 집 반의 반 칸도 못되는 월세집에 살고 있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운 채 강필중씨를 향해 ‘요즘 보기 드문 청년’ 이라 말해 줄 때, 그 따뜻한 말과 온화한 미소 한구석에는 강필중씨가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벽의 굳건함을 느낄 때마다, 강필중씨는 필시 자신의 연애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 짐작이 들어맞아 실제로 그들이 오래 가지 못했다면, 연애 이후의 상처도 그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하게만 새겨졌을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너무 오래갔다는 점이다. 그들은 동네에서 같이 자라며 오랫동안 알아 온 사이였던 만큼, 사귀게 됐다고 해서 갑자기 서로에게 실망하거나 돌아설 일이 없었다. 서로를 너무나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정상적인 연애의 진행에 방해가 된 적도 있었지만, 약간의 행운이 함께한 덕택에 결과적으로는 관계를 더 깊은 곳까지 진행시키는 데에 촉매가 되어 주었다. 둘의 사이에 방해로 작용했던 것은, 여자가 학교를 다니며 점점 바빠지는 동안 남자는 삼수까지 실패한 후에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해 버렸다는 것 정도였다. 곧 강필중씨는 입대해야 했고 여자는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학업이 너무 바빠서 남자나 만나고 다닐 시간도 없다고 했다. 강필중씨는 안심하고 입대했다. 그리고 전역할 즈음에는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세워 놓은 굳건한 벽도 무너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강필중씨가 미처 몰랐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 벽은 그녀의 어머니가 홀로 세워놓은 옹벽 따위가 아니라 보다 넓은 세상의 수상한 질서에 의해 세워진 장벽이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바쁜 학업이 이어지는 학교 울타리 안에도 여자가 만나고 다닐 남자는 수두룩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는 물론 강필중씨보다 멋지고, 똑똑하고, 돈이 많은데다가, 강필중씨를 방해하는 장벽을 굳이 부술 필요가 없는 사람도 많았다. 남은 것은? 그녀의 마음뿐이었다. 그것이 이들의 연애를 6년이나 지속시킨 유일한 동력이었다. 다만 그 마음이 사랑이었는지, 동정이었는지, 아니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는지, 그건 모를 일이다. 그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미안하다고만 했다. 속여 와서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그건 미안함에 가까운 감정인지도 모르겠다고, 강필중씨는 생각했다.
결과만 놓고 볼 때 여자는 그저 다른 남자에게 떠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강필중씨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새로운 남자가 강필중씨의 오랜 이름 중 하나를 가져갔다는 점이었다. 그는 여자의 어머니가 강필중씨의 등에 업혀 입원했을 때 수술을 집도한 의사였다. 그래서 여자의 어머니는 그를 ‘생명의 은인’ 이라고 불렀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자의 어머니는 이후로도 두세 차례 수술을 더 해야 했고, 그 남자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수술을 집도했다. 그리고 여자의 어머니는 건강해졌다. 그가 정말로 실력 있는 사람이란 증거였다. 그랬으니, 결국에는 강필중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길바닥에 실신한 사람을 업고 십오 분간 뛸 수 있는 능력이 그 사람의 배를 열고 아픈 부위를 꿰맬 수 있는 능력보다 나을 게 없다 치자. 하지만 모자랄 건 또 뭐란 말인가?
어떻게 보자면 강필중씨를 괴롭힌 것은 똑같은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너무나도 달랐다는 점 보다는, 오히려 헤어지던 날 여자가 했던 말들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부연설명도 없이 야속한 상처로 남은 말이란 늘 무가치한 억측을 낳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 아냐. 그 사람 만난 지 오래됐어.
어쩌다 그런 말이 나왔을까, 아마도 말실수였을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강필중은 따져 물었다. 군대 있을 때? 입대했을 때? 삼수했을 때? 이어지는 채근에도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무수한 계절의 맥들을 짚어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던 그는 결국 양보할 수 없는 지점과 마주했다.
그 날 병원에서?
그렇게 마지막이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2.
결국 강필중씨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그는 택배를 트럭 깊숙한 곳에 밀어넣고 다른 지역만 돌아다니다가 퇴근해 버렸다. 짐을 옮겨 실을 때 따로 바코드 작업을 하지 않았으니 아직 담당 택배기사로는 자신이 아니라 동료 박씨가 등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더 늦어지더라도 곧바로 확인전화가 걸려 오진 않을 거란 뜻이었다. 강필중씨는 내일 출근하거든 동료에게 택배를 반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연이 없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납득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씨는 다음날 아침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물류터미널 행정실을 통해 알아보니 아내가 많이 위독해져서 병원에 입원한데다가 간호하던 동료 본인까지도 몸이 안 좋아져서 생각보다 오래 쉬어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어제도 필중 씨가 대신해 주셨죠? 죄송하지만 오늘도 좀 부탁드릴게요. 수당은 계산해 둘게요. 행정실 여직원의 부탁에 도리질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강필중씨는 핸드폰에 찍힌 번호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락해도 괜찮을까, 목소리를 들어도 견딜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가 또 하루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두서없이 깨어난 오래된 기억들은 그의 현실을 타고 넘어 꿈결까지 지옥으로 만들 기세였다. 강필중씨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차라리 회사에 반납하면 다른 기사가 맡아 가기라도 하련만, 괴로워하면서도 고집스레 택배와 전화번호를 쥐고 있는 그의 마음도 참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 뉴스는 서울 시내에 퍼지기 시작한 괴질 소식으로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강필중씨는 상차작업을 하러 영업소 물류터미널에 도착해서야 괴질 소식을 접했는데, 사람들이 박씨의 아내와 박씨가 그 괴질에 감염됐다며 수군거렸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상차 작업을 잠시 미루고 사무실에 모여 텔레비전 뉴스를 지켜봤다.
뉴스는 괴질의 증상에 대해 설명했다. 감염 후 24시간동안 고열과 급성탈수증 등 신경이상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이성을 잃고 일종의 환각상태에 빠져서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 급격히 증가하는데, 이 공격성이 일시적으로 인간의 근력을 극한까지 발휘시킬 만큼 맹목적이기 때문에 환자 본인 이외에도 근방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감염은 환자의 타액이나 혈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며, 당국이 초기 대응과 격리에 실패한 탓에 서울 거리 곳곳에 감염자들이 출몰해 행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속보도 뒤따랐다.
생각보다 워낙 험악한 소식에 강필중씨와 동료들은 넋을 놓고 사무실에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오늘 일 쉬어야 되는 거 아냐?
에이, 위험하면 경찰이 통제를 하겠지. 아직 그런 소린 없잖아.
아니, 객관적으로 위험해 보이잖아? 정양, 거 소장님한테 말 좀 해봐요.
소장님 아직 출근 안하셨어요. 집에 전화할까요? 화내실 텐데. 성질 알잖아요.
나 참. 아니 배달할려구 돌아다니다가 덥석 잡혀서 물리면 어쩌라고. 박씨나 박씨 와이프도 물렸다는 거 아녀? 저, 저 봐. 지금 저 동네가 박씨 담당 구역이잖아. 저 동네가 위험하다는 거지, 지금? 오늘 저 동네 가는 기사분 누구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어수선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쪽으로 쏠렸다.
강씨 아녀?
강필중씨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 네. 그렇네요. 그러는 동안에도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불길한 소식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간밤의 목격담에 따르면 감염자들은 떼를 지어 지나가는 시민을 습격했다고 하며… 사람을 습격해 죽인 후 그 시체를 뜯어먹는 엽기적인 광경도… 경찰청은 곧 소문의 진위를 판단하는 한편 전염병관리본부와 협조 하에 국가 재난상황 선포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동료들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강씨, 오늘은 쉬지? 동네가 저렇다는데 저길 어떻게 가…
강필중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럴 수 없죠. 다 헛소문일 수도 있고 경찰도 재난상황 선포를 고려한다고만 했지 진짜 선포한다고는 안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각자 자기 할 일 열심히 하고 있으면 되는 겁니다. 뉴스는 호들갑떠는 게 할 일이고, 저는 물건 배달하는 게 할 일이고.
대충 이런 말이 생각날 수도 있었으련만, 정작 강필중씨가 한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야겠네요. 걱정되는 사람이 있어서…
물론 동료들은 강필중씨가 박씨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빈 차에 물건도 싣지 않고 너무나도 허겁지겁 출발하는 강필중씨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다른 기사들은 섣불리 출발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뉴스를 주시하며 임시 휴무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갑론을박이 길어졌지만 소장의 출근이 너무 늦어지자, 결국 불안해진 기사들은 다 같이 퇴근하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행정계 여직원 정양은 소장님이 화낼 거라며 불안해했지만 상사의 짜증보다 생명의 위협보다 더 무서울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로 강필중을 찾는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병원에 입원한 박 씨였다. 박 씨는 걱정스레 안부를 묻는 정양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내 앞으로 배정된 택배는 모두 배달된 거냐고 따져 물었다. 정양은 잠시 기록을 살펴보고는 다른 기사님들이 다 가지고 갔으니, 늦어도 어제까지는 배달이 다 되지 않았겠냐고 대답했다. 박 씨는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태도가 전에 없이 무례한데다가 퍽이나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몹시 나빠진 정양은 이 전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잠시 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조금 어려보이는 여자가 물류터미널 행정계로 들이닥쳤다. 두 사람 모두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눈동자는 터져버릴 것처럼 충혈 되어 있었다. 심상찮은 기색에 정양의 이맛살이 찌그러졌다.
두 사람 중 남자가 먼저 여직원을 발견하고 성큼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의사들이 입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가운 곳곳에 핏자국과 찌든 때가 가득한 걸로 봐서는 며칠간 응급실 당직이라도 마치고 온 것 같았다. 그것도 대형 교통사고 환자들이 들이닥친 응급실. 조금은 주눅 든 정양이 먼저 용건을 묻기도 전에 남자가 다짜고짜 말했다.
물건, 물건 찾으러 왔어요. 왜 이렇게 늦어요?
아, 배송지연…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여기서 찾으시면 안 되는데… 알겠습니다. 받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대학부속 특수전염연구소입니다. 빨리요. 급합니다.
잠시 만요… 아, 죄송합니다. 지금 담당 기사분이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나도 알아요. 내가 그 사람 담당했던 의사입니다. 다른 기사분이 맡으신 거 맞아요? 그 사람 누구에요. 배달 완료 확인했어요?
네… 어제까지 들어온 물건은 다른 기사 분들이 나눠서 전부 배송 완료했는데… 어머. 잠시 만요. ○○대학교면 주소가 어떻게 되죠? 기사 분들이 자기 원래 담당구역이 아니라 실수가 있었던 거 같아요. 잠시만요. 확인해 드릴게요.
남자는 이마에 손을 짚고 빠르게 주소를 불렀다. 그러는 사이 뒤쪽에서 숨을 고른 여자가 초조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컴퓨터가 검색에 들어간 사이 여직원은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사람들은 왜 멀쩡한 전화를 두고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얼마나 급한 사정이기에?
그런데 그 분 담당이세요? 지금 어떤가요? 많이 안 좋으세요?
죽었어요.
네?
죽었다고요. 뉴스도 안 봐요?
죽다뇨. 제가 아까 전화도 받았는데…
당장 텔레비전 켜세요. 라디오를 키던가. 머지않아 서울에 소개령 떨어질 거에요. 소개령 떨어지기 전에 폭탄이 먼저 떨어질 수도 있고. 좌우간 살고 싶으면 아무거나 듣고 있으세요. 아뇨아뇨. 지금은 일단 앉아요. 담당 기사님 누구냐니깐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TV를 켜려던 여직원은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불러드릴게요. 이름은 강필중이구요, 번호는…
뒤쪽에 서 있던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이름이 뭐라구요?
…강필중이요.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이야?
…설마, 아닐 거에요. 죄송합니다. 번호 계속 불러주세요.
하지만 이윽고 전화번호를 다 받아 적은 여자의 얼굴이 너무나 심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온 남자뿐만 아니라 이 여자를 생전 처음 보는 행정계 여직원까지도 강필중씨와 이 여자가 보통 관계가 아니란 것을 짐작할 만 했다. 여자는 핸드폰을 들고 오지 않은 남자 대신 번호를 받아 자신의 핸드폰에 찍었으면서도 막상 직접 전화를 걸지 못했다. 남자가 눈을 힐끔 돌려 그녀의 핸드폰을 훔쳐보았다. 여직원이 방금 불러준 번호 아래쪽으로 방금 불러준 택배기사의 이름이 함께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번호와 이름을 함께 받아 쓴 것 같지는 않았고, 아무래도 이미 저장되어 있는 번호란 뜻이었다.
누군데?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3.
○○대학부속 특수전염연구소는 서울을 난장판으로 만든 괴질의 정체를 처음으로 밝혀낸 곳이다. 하지만 몇몇 시민들은 특수전염연구소가 그 기원이나 유행 시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의심할만한 것이, 최초형태의 백신 혈청은 서울에서 괴질의 첫 감염자가 발견되던 그 날에 이미 서울시내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도 특수전염연구소는 이 백신이 언제 개발되었으며, 연구소가 언제 괴질 유행을 예상하고 백신 연구에 착수했는지, 또 배송에는 어떤 방해가 있었는지 해명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합리적인 이유를 두 가지 정도 떠올릴 수 있는데, 우선은 괴질 백신 연구가 애초에 연구소 자체 예산으로 진행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연구소가 풍비박산난 지금은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고, 다음은 의혹을 밝혀내야 할 사람들이 괴질 유행의 첫 단계에서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다.
특수전염연구소 근처에는 ○○대학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서울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괴질 감염자들이 발견됐지만, 무슨 우연이었는지 이 병원만큼 많은 수가 한꺼번에 발견된 곳은 없었다. 오후 들어 심상치 않은 전염속도에 정신을 차린 특수전염연구소장과 병원장이 의료인력 대피와 병원 폐쇄를 지시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은 뒤였다. 감염자들은 격벽이 다 설치되기 전에 병원 전체를 휩쓸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특수전염연구소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시작해 파도처럼 서울 시내를 휩쓴 감염자들의 최초 타겟 중 하나였다. 그래도 인근 병동에 있던 의료관계자나 환자들의 경우 사전 대피 인원을 제외하고도 상당수가 살아남았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특수전염연구소 인력이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도 의혹의 근거가 될 만하다. 이 건물 안에 있던 자들은 자신들이라면 감염자들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혹은 감염자들을 뒤에 둔 채로 비겁하게 도망갈 수는 없다는 책임감에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연구원 두 명은 그 시각, 서울 외곽의 한 물류터미널에 있었다. 배송이 한 없이 지연되던 최초 형태의 백신 혈청을 직접 찾으러 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의도치 않은 사전대피에 성공했지만, 정작 그 시각에 그들이 찾는 백신 혈청은 위험지대 한복판에 들어가 있었다. 강필중씨의 택배트럭 짐칸 한구석에.
물류터미널에서 강필중씨가 출발하던 때만 하더라도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경찰도 지역 경계에 저지선을 설정하기 이전이었고 수방사도 아직 작전을 개시하지 않아서, 강필중씨의 택배트럭은 물론이고 시민들의 차량도 자유롭게 오염지역과 안전지역을 오갈 수 있었다. 다만 강필중씨는 반대편에서 시내를 빠져나오는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문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걸 목격했다.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쉴 새 없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차량 통행이 원활하지 못하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자가용 운전을 자제하시고, 침착하게 현재 위치에서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당국의 상황 발표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 방송을 기억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방송 지시대로 대처한 사람은 거의 다 죽거나 감염됐으니까.
미친 듯 차를 몰면서도 강필중씨는 정작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12년 전, 사람을 업고 미친 듯이 뛰어갔던 병원도 같은 곳이었다. 그 때도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숨을 돌린 후에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에게 그녀의 이름을 말해준 것이 전부였다. 응급처치 후 정신을 차린 여자의 어머니는 강필중씨보다 의사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강필중이란 사람이 당신을 업고 십오 분 간 뛰었노라는 설명을 들은 것은, 수술도 끝나고 마취도 풀려 커피 한잔을 마실 여유도 되찾은 후의 일이었다. 혹시나 그 때, 의사보다 강필중씨의 얼굴을 먼저 봤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강필중씨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옳은 일은 옳은 일 그대로 보답 받는 것이지, 그걸 전하는 방식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누군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였더라?
아마도 그녀였을 것이다.
라디오 안내방송에서 특이한 환자를 목격하면 특수전염연구소로 제보해 달라며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있었다. 강필중씨는 그 번호로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통화중이었고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신호조차 제대로 가지 않았다. 시내 통화량이 폭증한 탓이었다.
강필중씨는 결국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못한 채 연구소에 이르렀다. 트럭 운전대를 잡고 목을 내밀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본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깨진 창문, 부서진 난간, 곳곳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몸을 떨고 있는 사람들. 차창이 부서지거나 보닛이 구부러진 차들이 주차장 곳곳에 제멋대로 멈춰 있었다. 어디선가 긴 경적소리가 불안하게 울려퍼졌다. 누군가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움직이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제일 정면에 높다랗게 보이는 병원에선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형체들이 뛰거나 기거나 걸어 다니며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 감염자들이었다. 싸늘한 감각이 강필중씨의 정수리에서 시작해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여기 누가 있건, 그가 제정신으로 살아있을 확률은 별로 높지 않아 보였다.
특수전염연구소를 찾아가는 동안, 최대한 불필요한 주의를 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차피 이곳에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차량은 강필중씨가 모는 택배차량 한 대 뿐이었다.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세차게 뛰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슴 밖으로 튕겨 날아갈 기세였다. 두 손으로 기도하듯 운전대를 부여잡은 강필중씨는 울상을 지은 채 이정표를 찾아 눈을 굴렸다. 연구소는 낮고 넓은 캠퍼스 교차로를 돌고 돌아, 참 찾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강필중씨가 도착했을 때 연구소는, 이미 감염자들의 물결이 지나간 뒤였다. 살아있는 자는 모두 죽고 감염자들은 거의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연구소 건물을 바라봤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와 절망과 무력감이 강필중씨를 휘감았다. 그녀가 저 건물 안에 있을지, 있다 하더라도 제정신으로 살아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다리를 떨고 이를 딱딱거리고 운전대를 두드리며 한참동안 먼발치서 연구소를 바라보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래, 전화를, 걸자. 그리고 여태까지 주저한 자신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번호를 향해 통화를 시도했다. 물론, 이미 무선전화망이 폭주한 탓에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응답을 기다리던 강필중씨는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차에서 내려 조심스레 연구소를 향해 걸어갔다.
마침 같은 시간에, 물류터미널에서 강필중씨의 번호를 넘겨받은 연구원들도 연구소로 돌아가는 동시에 그를 향해 맹렬하게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어쨌든 양 쪽의 간절한 통화가 모두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던 셈이다. 시내에서 빠져나오는 내내 극심한 교통체증에 발목을 잡혔던 그들은 시내에 들어갈 때에는 경찰과 군의 저지를 받아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에, 강필중씨보다 한참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특수전염연구소 피습 소식을 접한 군과 경찰은 감염자 전원 사살을 원칙으로 삼고 오염구역 초토화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전 개시와 동시에 경찰 저지선 내부에 있는 인명 보장을 중지한다는 뜻이었다. 저지선에서 연구소장과 통화를 시도하던 두 연구원은 곧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에 이르는 인명이 자신들의 지식과 강필중씨가 가지고 있는 택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운전대를 잡고 경찰 저지선을 강행 돌파하기로 했다. 길을 가로막은 바리케이트를 향해 시속 팔십 킬로미터로 질주한 연구원들의 자동차는 앞 범퍼가 찌그러지고 유리창에 금이 갔지만, 당장 달리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자동차보다 더 큰 손상을 입은 것처럼 보인 것은 오히려 두 연구원의 심리상태였다. 당장 급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연구원일 뿐 액션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자는 뒷자리에서 얼굴을 감싸 쥔 채 말을 잊었고, 새파래진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자는 한참 만에 이렇게 말했다.
좀 더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렇게까지 해야 돼?
여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 사람을 꼭 만나야 돼요.
그래, 당장 사람 목숨이 많이 걸려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혈청은 다시 만들 수도 있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리고 여기 풍경 좀 보라고. 병원 감염자들이 다 탈출한 거야. 그게 얼마나 되는지 알잖아? 이미 늦었어. 내 생각엔 그냥 격리시키고 초토화를 시작하는 편이…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
그게…
대답할 말이 막막해진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신호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잠깐만요. 신호가 가요!
세상에, 진짜? 진짜지? 만세…! 잠깐. 이거 왜 이러지? 어…?
조용히 좀 해 봐요. 아마 격리지역에 사람이 많이 줄거나, 조치가 취해졌을 거예요. 음질이 안 좋긴 한데 신호는 분명히 가고 있으니까… 아뇨. 계속 움직여도 괜찮아요. 차는 왜 세우세요? 저기 저 사람들 안 보여요? 감염자들 같은데요? 시동 끈 거에요 지금?
…내가 세운 게 아냐. 저절로 멈춘 거야. 시동이 안 걸려.
한편 적막한 연구소 내부를 숨죽인 채 움직이던 강필중씨는 전화 진동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너무나 익숙한 번호가 액정에 떠 있었다. 세상에. 혼자 중얼거린 그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6년 만에 들려주는 목소리.
여보…세요?
대답은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강필중씨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꼬박 6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공연히 서둘렀다가 후회할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급박하게 몰아쉬는 숨소리와 그 숨을 틀어막는 감정의 격류가 전화기 너머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강필중씨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가 분명한 단어로 그 감정을 표현하기 이전까지는.
필중아. 살려줘…
머리털이 거꾸로 서는 느낌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거기 어딘데? 너 지금 어디 있는 건데?
지금 차 안이야. 너한테 가는 길에 차가 고장 났는데, 감염자들이 주변에 많아… 아니, 아니지. 필중아? 내 말 들려? 네가 가진 택배 있지? 그거 아직 가지고 있어? 필중아!
강필중씨는 그녀의 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 연구소 안에 아직 남아있던 감염자 한 명이 강필중씨를 뒤에서 덮쳤던 것이다. 감염자는 몸무게를 실어 강필중씨를 바닥에 쓰러트린 뒤 놀랄만한 힘으로 뒷덜미를 짓누르더니 고개를 숙여 맨살을 물어뜯었다. 강필중씨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전화기가 바닥에 뒹구는 소음에 깜짝 놀란 여자는 곧이어 둔탁한 비명이 먼발치서 들려오자 그만 전화기를 붙잡고 악다구니를 쓰고 말았다.
필중아아아악!
지금이라면 누구도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다. 감염자들은 큰 소리에 민감하다는 게 밝혀졌으니까.
4.
어쨌건, 결과적으로 그들은 수십만의 생명을 구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거기에는 다시 약간씩의 행운이 필요했다.
강필중씨에게 행운은 인근에 다른 감염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감염자가 근력을 극한까지 발휘한다고는 하지만 강필중씨도 힘으로는 누구에게 뒤지는 일이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격투 끝에 자신을 습격한 감염자를 제압하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도 한 번 연결된 통화는 그 때까지 두절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감염자에게 물어뜯기고 감염자의 피도 온몸에 뒤집어써야 했다. 하지만 강필중씨는 한동안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두 연구원에게 행운은 경찰 저지선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점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열 명이 넘는 감염자에게 습격을 당했지만, 다행히도 상황을 파악하고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다만 남자 연구원은 여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며 감염자들과 격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감염자들의 피에 노출되고 말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가까스로 구조된 직후에도 넋이 나간 표정만 짓고 있었다.
여자는 전화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강필중과 통화를 시도했다. 당장 그가 가지고 있는 백신 혈청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둘러 연구소를 빠져나온 강필중씨는 곧 택배 트럭을 몰고 경찰저지선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임상 덕택에, 감염 1시간 이내에 백신을 접종하게 되면 성공적으로 항체가 형성된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었다. 슬프지만, 이와 함께 증명된 것은 감염 20시간 이후에는 백신을 접종해도 항체가 형성되지 않으며, 무슨 수를 써도 괴질의 진행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비극은 일정 부분, 강필중씨의 탓이기도 하다. 그는 통화에서 자신이 감염자에게 상처를 입었다거나 그 피를 뒤집어썼다는 것을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그러니 의료진 입장에서는 두 명 분의 접종을 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한 사람도 제대로 살리지 못할 확률이 높았고, 시간도 부족했다. 뜻하지 않게 선택권을 쥐게 된 여자는 뒤늦게 고민에 빠졌지만, 강필중씨는 이미 할 일을 다 끝내버린 반면 남자 연구원은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옛 애인과 현재 애인이라는 격차만큼이나, 두 목숨의 차이는 분명했다.
사실 그녀는 강필중씨를 다시 만나거든 꼭 끌어안아 줄 참이었다. 한 사람을 구하고 이어서 수십만을 구할 공헌을 세운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보상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어머니를 구했을 때에도, 그는 비슷한 형태로 보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고마움에 대한 보상이었던 걸까? 그런 걸 따지는 게 중요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사소한 감흥으로 시작되더라도, 놀랄 만큼 순수한 열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게 사랑임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피투성이가 된 강필중씨가 트럭 문을 열고 무너질 듯 웃으며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 따위 감흥은 미처 피어오르기도 전에 순수한 공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강필중씨는 영문을 모른 채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신속히 격리되었다. 그리고 감염이 더 진행되어 이성을 잃는 순간까지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전화통화만이 몇 차례 진행되었는데, 이때의 기록에 따르면 강필중씨는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왜 갇혀있는 거야? 내가 감염된 거야?
바보야. 물렸단 얘기, 왜 안했어. 일단은 거기 있어야 돼. 그래도 네가 가져온 백신이 있으니까, 금방 고칠 수 있어. 조금만 참고 있어. 알았지?
그게 중요한 거였구나… 금방 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래. 네가 구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알아? 적어도 수십만 명이야. 백신이 대량생산되기 시작되면 초토화 작전도 중지되거든. 만약에… 그걸 다시 생산 하려면 몇 달은 더 필요했을걸.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네가 세상을 구했어. 이 바깥에선 전부 네 얘기뿐이야…
알았어. 내가 하긴 뭘 했다고… 만나고 싶다.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래. 곧 봐.
보고 싶었어. 넌 아니야?
…나도.
잘 안 들려. 뭐라고?
…….
두 연구원은 오늘날까지 괴질 백신과 치료제 개발자로 유명하다. 두 사람에게는 세상을 구했다는 수식어도 곧잘 붙는 편이다. 완전히 붕괴된 특수전염연구소를 대신해 괴질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그 두 사람 뿐이었기 때문이다. 최초 형태 백신 접종을 통해 최초 항체를 갖게 된 남자 연구원은 자신의 혈청 샘플을 바탕으로 스무 시간 만에 백신을 개발해 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결국 이 백신이 세상을 구하고야 만다.
물론 이 백신의 최초 접종자였으며 최초의 실패이기도 했던 강필중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택배기사에게 세상을 구했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조금 낯설지 모른다. 애초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배송지연도 사실은 그가 자초한 것이었으니까, 강필중씨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그가 세상을 구했다는 말에는 고개를 가로젓는 경우가 많다.
감염진행 이후 이성을 잃은 강필중씨는 극도의 폭력성을 보인 끝에 이틀 만에 사살되었다. 그가 사살되던 날, 그 대신 목숨을 건진 남자 연구원이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격벽 바깥에서 현장을 보고 있었다. 두 남자는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강필중씨는 이미 이성을 잃었으니까, 한없이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가까운 듯 멀리 있는 저 의사선생이, 어쩌면 이 상황이,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을 구했는지도 모를 택배기사 강필중은 끝내 넘지 못한 벽 안에서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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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ights of CydoniaKnights of Cydonia
Posted at 2011/11/11 01:44 | Posted in 잡글들/소설 아버지의 실종이 명확해지자, 사람들은 아버지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너무 쉽게. 마치 애초부터 아버지가 실패하기를 기다려왔던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아버지의 실패에 과장된 수사를 덧바르고 의미를 채색해 성마른 애도사를 생산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떠난 순간부터 아버지를 기다린 나에게, 사람들의 애도는 일종의 과격하고 서툰 네크로필리즘처럼 느껴졌다. 산 사람을 질식시켜 절벽 너머로 떨어트린 후에야 먼 곳을 향해 바치는 애도. 그건 누구를 위한 애도였을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성공 같은 걸 믿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좌절한 영웅의 무덤에 꽃을 무더기로 바치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엄숙한 제의를 행하고, 아직 먼발치서 빛나는 희망과 막아내야 할 절망을 노래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희망은 그런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절망도 마찬가지로 도래하지 않는다. 삶이란 원래 그 중간의 어디쯤을 부표처럼 떠다니다가 고요히 썩어가기 마련이란 걸, 상상력이 부족한 이들은 미처 떠올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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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도니아 기사단은 ‘실재하는 외계의 위협으로부터 인류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기사단 헌장 첫머리에 새겨진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두말할 것 없이 ‘실재(實在)하는’ 이다. 기사단은 해왕성 궤도에서 접근하는 일련의 외계 함대가 공식 확인된 후 창설이 결의된 국제단체이기 때문이다. 기사단은 외계 문명과의 최초접촉을 준비하고 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인류의 첫걸음이었다. 물론 초창기의 기사단은 단순한 자문기구였을 뿐 권력집단이 아니었고 이름도 기사단이 아니었다. 지구상의 어떤 권력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자문기구가 세계정부를 방불케 하는 규모로 성장한 것은, 물론 기사단을 이용한 강대국들의 신경전과 이것을 거꾸로 이용한 기사단장의 교활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 역시 항공모함 스카이-스크레이퍼호 침몰사건으로 시작된 일련의 소동들이 큰 역할을 했다.
미 태평양함대 소속 스카이-스크레이퍼 호는 사고 당시 남지나해를 항해 중이었는데, 한밤중에 선체 중앙이 동강난 채 침몰했다. 삽시간에 수천 명의 군인이 희생당했다. 그런데 간신히 구조된 생존자들도, 곧바로 사건 조사에 착수한 미 군부도, 수 일이 지나도록 사고의 원인을 뚜렷이 밝혀내지 못했다. 누군가 함선에 공격을 가했거나, 함선 내부에서 테러가 자행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사건이란 걸 전 세계인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국내의 엄청난 비난여론에 직면한 미국이 유난히 초조했던 이유는 마침 대선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머지않아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용의자, 중국이 대두됐다. 하지만 중국은 스카이-스크레이퍼호가 자국 근방에서 침몰했다는 이유만으로, 뚜렷한 증거도 없이 잠재적인 용의자로 몰리는 것을 적잖이 불쾌하게 여겼다.
국제사회의 기류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지는 와중에 결국 중재에 나선 것이 최초접촉상황연구소, 오늘날의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은 사건조사 보름 만에 이 사건을 외계인의 소행으로 결론내리고 UN에 최종 보고서를 올린다.
그 결과, 일주일 후 치러진 대선에서 미국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다.
당시 취재기자로 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이 사건에 대해 제법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기사단의 최종 발표를 비웃었다. 아마도 기사단의 발표를 들은 전 세계인의 반응이 모두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차대한 사건의 조사에 나선 국제기구가 외계인의 무력행사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충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정권교체 후 미국은 재조사에 임했지만 만족할만한 결론 – 즉 국제관계를 험악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국내 여론을 안정시키는 – 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기사단장, 당시 최초접촉상황연구소장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UN과 미 정계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기사단의 초석을 닦기 시작했다.
침몰 사건 2년 후, 기사단장은 UN 총회에 출석해 스카이-스크레이퍼호 침몰사건의 재조사를 촉구하는 한편 외계의 위협이 가까이 왔음을 경고한다. 이 때 기사단장의 연설이 전 세계에 사이도니아 기사단 창설을 처음 공표하게 된 역사적인 연설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단장은 연설 말미에 평소 좋아한다고 밝힌 뮤즈(Muse)의 노랫말을 인용해 미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How can we win when *these* fools can be kings?
Don't waste your time or time will waste you.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
이듬해, 재조사에 돌입한 스카이 스크레이퍼호 침몰사건이 외계인의 소행으로 공식 인정되고, 기사단이 창설된다. 기사단장의 역사적인 연설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름은 사이도니아 기사단이 되었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기사단의 창설을 비웃는 기사를 쏟아내다가 해직 당했다. 아버지는 아직, 한 시대의 상식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기사단의 영향력이 커지지 않은 시기였던 덕택에, 아버지는 금세 다른 직장을 잡고 자신의 논조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작 몇 해 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늘날까지도 기사단의 권력에 그 위세를 제공하는 사건 – 인베이젼Invasion이 발발한 것이다.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인베이젼은 “광기 그 자체” 였다. 그것은 이후 한 세대를 지배하게 될 상식이 만들어지는 현장이자 일종의 시대적 트라우마가 세계인의 집단지성 한복판에 새겨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인베이젼 역시, 기사단장의 연설에서 시작됐다. 그는 미 상원에 출석한 자리에서, 세계 곳곳에 외계인의 하수인이 암약하고 있다며 유력한 세계 정·재계 인사의 실명을 거론했다. 그 중에는 현재 상원에 출석한 의원 한 명도 속해 있었다. 지적당한 의원이 단상에 올라와 기사단장에게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우리는 매카시즘을 경험한 나라이며, 이제 와서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진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시민의 힘을 경시하고 공포로 진실을 짓누르려 하는 교활한 수법은… 항의 연설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에 총성이 울렸다. 연설하던 의원이 쓰러졌고, 기사단장이 권총을 든 채 당황한 의원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그는 즉각 총을 들고 출동한 국회 경위들에 의해 저격당하기 직전- 단상에 쓰러진 의원의 얼굴 가죽을 잡아 뜯었다. 고무 반죽처럼 찢겨져 나간 얼굴 뒤편으로 흉측한 녹색 피부가 드러났다. 아마 지구상의 누구라도 그 순간, 그 녹색을 보고 떠올릴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으리라. 기사단장은 의원 – 그러니까 외계인 – 의 시체를 짓밟고 서서, 경악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인을 향해 던지는 경고였다.
국회 사무처에 의해 고스란히 녹화된 이 영상은 단 몇 시간 만에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기사단은 곧 UN보고서를 통해 이와 같은 수법으로 지구에 침입[Invasion]한 외계인의 1차 리스트를 공개하는데, 아버지는 이 보고서 자체가 정치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미 누구에게도 먹혀들 리 없는 주장이었다. 기사단의 리스트에 기재된 이들은 모두 신속히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 외계인의 하수인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당연히, 아직도 지구상에 암약하고 있는 침입자가 더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세계를 사로잡았다.
이 무렵 외계인 감별을 위해 가장 유행했던 질문이 “스카이-스크레이퍼호 침몰사건이 외계인의 소행이란 걸 믿습니까?” 였다. 어떤 반론이나 여백도 존재할 수 없이 꽉 막힌 질문과 동반된 것은 그 질문 못지않게 무식한 폭력사태였다. 세계 곳곳에 외계 침입자를 축출한다는 명분 아래 활동하는 자경단, 시민단체, 정치세력이 출연했다. 결국 치안공백을 우려한 각국 정부가 기사단에 외계인 구별법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지만, 기사단은 “그것은 기밀 정보이며, 지구 차원의 안보를 위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며 요구를 일축했다. 기사단장은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지구 궤도를 향해 접근중인 외계함대에 대한 정보 공개도 중단해 버렸다. 외계인에 대한 거의 모든 ‘믿을만한’ 정보는 지구 안보의 기치 아래 미지의 영역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사단의 영역 바깥에 남은 거라곤 근거 없는 공포와 억측뿐이었다.
아버지는 데스크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지면과 전파를 이용해 기사단의 정보차단과 월권행위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정보와 증거는 기사단의 손아귀에 있었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약한 추측과 무너져가는 상식의 힘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힘겹게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너무 쉽게 결론내리거나 포기했다. 쉽게 결론내린 사람들은 기사단이 지구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으며, 포기한 사람들은 기사단이 지구를 지켜주건 말건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별 상관은 없었다. 기사단이 세계경찰권을 위임받고, 정치범을 양산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으로 정복한 몇몇 국가에 대한 실질적 행정 권력과 막대한 이권을 손아귀에 넣고, 이윽고 독자적 군사권을 손에 넣었을 때에도 지구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니까.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대부분 TV 속의 일이었고, 그저 이따금씩 외계인 색출을 위한 혈액검사에 동참하기만 하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비교적 잘 유지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모든 증거는 조작되었으며 외계인에 대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기사단 비밀경찰이나 기사단의 내정간섭을 껄끄러워하는 당국에 체포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아버지가 상식을 거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단순한 순응파나 온건한 반대파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더더욱 시끄럽게 소리를 내어 아예 반대파의 거두가 되는 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상식을 거부한 대가로 아버지는 세상에 끈질기게 흔적을 남겼다. 아버지의 발언 하나 하나는 늘 기사화되어 신문과 방송에 실려 나왔다. 아마도 기사단은, 어느 순간 아버지를 세상에서 아예 지워버리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흔적과 공존하는 편이 좀 더 경제적이란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단편적이고 왜곡된 흔적이었다. 신문과 방송에 남은 아버지의 흔적은 고약하고 교활한 외계세력 추종자, 혹은 좋아봐야 세상을 모르는 지나친 이상주의자 정도로 비춰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가 신문이나 TV에 나올 때면 그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건조하게 말할 뿐이었다.
“저 인간이 네 애비다.”
어머니의 결혼 조건은 아버지가 부서를 문화부나 경제부로 옮기고, 외계인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가지는 조건은 더 확고했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집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기를 해외입양 시켜버리겠다고 협박했단다. 물론 둘 중 어느 것도 지켜지지 않았건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무수한 말들과 시간의 포화 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실패를 예단하지 않았고 늘 집에 없는 아버지를 영웅으로 떠받들지도 않았다. 다만, 기다릴 뿐이었다. 어머니의 기다림은 늘 가파른 희망과 숨막히는 절망 사이를 기약 없이 떠돌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바칠 수 있는 어떤 애도나 찬사보다도 삶의 진실된 맥락에 가깝게 가닿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내가 열한 살 되던 해에 결실을 맺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 한 구석에 아버지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아버지가, 나는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항상 TV나 신문에서 보던 사람이라 그랬던 걸까, 아니면 언젠가는 돌아올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팔을 툭툭 치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나를 유난히 낯설어했던 것은 오히려 아버지 쪽이었다. 마치, 자신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듯이.
나는 그 순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버지, 그런데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아버지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내려 보다가, 품을 벌려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아마도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아이에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상상력이 풍부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머니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를 사랑했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뭐, 사실 그런 얘기를 상세히 들을 만큼 함께한 시간이 길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두 분의 사연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는지, 연애를 하긴 했는지, 외계인에 대한 어머니의 의견은 어땠는지.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등등. 그러니 내가 아는 거라곤 어머니가 누군가를 온전히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사람이라곤 어머니밖에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먼 곳으로 떠났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도시였고, 앞으로 십수 년간 내가 살게 될 곳이었다. 맞다. 이제는 반군의 중심지로 불리는 미스테리 서클, 나는 전 세계에서 UFO가 가장 많이 출몰한다고 알려진 그 저주받은 지역의 중심부에 살고 있다. 물론 나는 단 한번도 UFO 따위를 목격한 적이 없다. 내 눈에는 오히려 간헐적으로 이곳을 정리하러 병정개미처럼 달려드는 기사단 휘하 비밀경찰들이 더 자주 보인다. 총성과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여기가 밖에서 보기보다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미묘한 정치적 이유가 있다. 기사단이 아버지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대신 세상에 남겨놓는 것을 택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반군의 활동이 뉴스를 점령하고 기승을 부릴수록 기사단의 권력도 그에 비례하여 강대해지니까.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각의 해석이란 점이 문제다.
반군 내부에도 세력이 분분해서, 일각에는 외계인의 존재를 실제로 믿고 따르는 분파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또 일부분은 자신들이 실제 외계 함대와 교신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머지않아 압제에 시달리는 지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종의 종교집단에 가깝다.
한편으론 외계인은 존재하나 아직 교신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분파도 있는데, 이들은 지구에 존재하는 외계인을 무작정 ‘침략자’ 로 규정짓고 살해하는 행위가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즉, 우주적 평화주의자인 셈이다. 이들은 기사단이 실제 외계인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반군을 섬멸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거나, 반군이 실제 외계 기술을 통해 기사단을 상대하기 때문에 미스테리 서클이 온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발 디딘 땅에서 한 뼘도 날아보지 못한 인간이 섣불리 상상하기에 이런 말들은 너무나도 우주적이다.
좀 덜 우주적인 분파는 어떨까?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 않는 세력 간에도 분파가 다양해서, 그들의 침략은 부정하지만 함대의 존재는 믿는 세력, 침략과 함대의 존재 모두 부정하는 세력, 침략과 함대의 존재 모두 인정하되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믿는 세력 간의 계파갈등이 나름 심각한 편이다. 그래봐야 모두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일이니- 누가 누굴 싫어하고 좋아하건, 떨거지들의 사정은 딱히 신경 쓸 일이 못된다. 어차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일이다. 그들이 아는 단체는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암살단.
암살단은 민간에서 쫓겨나 이 곳, 미스테리 서클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을 ‘반군’ 이라 칭할만한 빌미를 제공한다. 그들은 자존심만 살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이상적 평화주의자들과 입만 살아 정신적 상해만 입히기 일쑤인 단순 마초들만 가득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집단이다. 그러나 외계인의 접근에 대한 암살단의 정확한 입장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아마 암살단의 수뇌부라 할지라도 이 입장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취재에 따르면 – 애초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스테리 서클에 자리를 잡을 무렵, 아버지는 이미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은 언론인이었고, 아마도 입으로만 떠드는 저항활동에 제일 먼저 환멸을 느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기사단의 가장 큰 무기가 무력이 아닌 공포이기 때문이었다. 힘으로 짓밟은 자들은 힘이 빠질 때까지 끝없이 기어오르지만, 공포로 굴복시킨 자들은 공포가 가실 때까지 언제까지고 제 발로 기어들어간 수렁에 처박혀 있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전 세계가 기사단의 공포 앞에 제 발로 무릎을 꿇고 근거 없는 굴종의 수렁에 몸을 던지는 것을 무력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해직시키고, 책 출간을 저지하고, 라디오 채널을 차단하고,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 어디 기사단장 개인의 의지였을까? 권력 앞에 제 발 저린 자들이 벌이는 하찮은 방해활동에 허우적대다가 어딘가로 자빠지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기어코 그 자들이 아내를 잡아가고 아이를 고아로 만들었는데도?
아버지의 저항활동은 오랫동안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본질 – 즉 외계인의 존재와 관련한 인류의 태도 – 로 다가선다고 해서 문제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반군들은 앞서 설명한 몇 개의 분파로 나뉘어 서로 배척하고 딴죽을 울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들 모두를 섣부르게 욕하기보다는, 보다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릴 무렵, 암살단을 만나게 된다.
내가 열네 살이 될 무렵, 세계인의 머릿속에 반군과 암살단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사건이 발발한다. 교황청을 방문 중이던 기사단 고위간부가 호텔에서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기사단은 이 사건을 외계인의 소행으로 돌리고 싶었겠지만, 이미 발 빠른 암살자는 인터넷에 동영상을 띄우고 스스로의 정체를 공개해 버린다.
짤막한 비디오에서 암살범은 사건현장인 호텔에 직접 복면을 쓰고 등장했다. 침대 위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기사단 고위간부가 누워있었다. 일단 시체 옆에 서서 직접 그가 사망했다는 걸 카메라에 비춘 범인은 딱딱하고 서툰 영어로 말했다.
“우리는 암살단이다. 이 영상을 보고 있는 세계인에게 경고한다. 오늘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들. 사이도니아 기사단이다. 그대들이 일치단결하여 이들을 몰아내지 못하면, 외계인이 도래하기도 전에 지구는 산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암살단이다. 우리는 백신이다. 그대들이 스스로를 정화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그대들을 정화할 것이다. 명심하라.”
아버지는 비디오를 보자마자 로마로 날아갔다. 그리고 아마 그 곳에서 처음으로 암살단의 누군가와 마주했을 것이다. 자정능력을 잃은 인간들을 스스로 정화하겠다는 이들의 논리에 아버지가 얼마나 수긍했는지, 혹은 이들 조직을 이용해먹을 구체적인 복안을 갖춘 것뿐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어쨌건 아버지는 이 날 이후 암살단에 합류했고, 암살단에 합류한 이후 아버지와는 자세히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오래도록 로마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대신 집으로 찾아온 암살단의 요원과 함께 집을 옮겼다. 이후로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분주하게 거처를 옮겨야 했다. 아버지의 구체적인 생각이야 어찌됐건 아버지가 내 처지를 훨씬 위험하게 만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암살단에 합류한 이후로 아버지는 글쓰는 일을 중단했다. 절필을 공개선언한 일이야 없지만 아마 그런 짓까지도 저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후 실종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생각은, 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도 알려진 바가 없다. 짤막한 대화를 나누거나 눈빛을 교환한 것으로 누군가의 깊은 생각을 알 수 있는 거라면, 그나마 같은 집에 살았던 내가 아버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닿았을 확률이 높다. 암살단에 합류한 이후로 아버지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미안하다.”
였고, 그 다음으로 많이 한 말은,
“무섭구나.”
였다.
미안하다는 것은 나에게 한 말이고 무섭다는 것은 자신에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는 알 수 있지만, 무엇이 무섭다는 건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말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간신히 길어 올린 한 마디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를 그토록 절망케 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마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도 ‘그것’ 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도 그게 뭔지는 잘 몰랐으리라고 생각한다. 직접 사람들의 목숨을 끊는 게 무서웠을까. 그러다가 자기가 누군가에게 죽게 되는 게 무서웠을까. 아니면 그러다가 하나 남은 자식도 누군가에게 잡혀가고 세상에 홀로 남게 되는 게 무서웠을까. 혹은 어찌어찌 그 모든 걸 다 겪어내고 난다 해도 세상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까봐… 그게 무서웠을까.
바티칸 암살 이후 기사단이 공식적으로 ‘암살단의 소행’ 이라 인정한 살인사건은 100건 남짓이다. 하지만 이 중 대부분은 암살단이 직접 스스로의 소행임을 인정한 것이고, 실제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크다. 기사단은 암살단의 존재를 감추려고 애썼다. 어째서? 기사단은 암살단과 같은 링 위에 서기를 꺼려했다. 기사단이 창설 이래 처음으로 누군가와 맞서 싸우기를 피한 것이다. 아니, 사실은 창설 이래 기사단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집단이 아예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기사단은 정치집단이다. 이들은 복잡하고 교활하고 은밀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암살단은 범죄자 집단이다. 이들은 훨씬 단순하고 노골적이며 충격적이었다. 순수한 충격 앞에서 암살단을 외계인 추종집단으로, 지구 종말을 몰고 올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된 프레임이며, 따라서 누구라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충격을 마주한 사람들이란 항상 자신들의 상상 너머에 있는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인류의 백신’ 암살단은 그것을 가져다주었다. 조금씩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수렁 아래 무릎 꿇린 자들을 직시하는 조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암살단을 세계에서 지워버려야 했다. 어떤 흔적조차도 남김없이.
이에 암살단은 – 어쩌면 최종 목표라 할 수 있는 암살대상을 설정한다. 기사단장을 암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임무에 자원한 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 날 저녁을 나와 함께 먹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유난히 깊었던 침묵을 깨고 딱 두 마디를 꺼냈다.
“미안하다.”
그리고
“나는, 무섭구나…”
이 날 밤, 암살단은 임무를 받고 집을 떠난 아버지와 연락이 끊겼다. 기사단장은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암살단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아버지가 석 달 전에 기사단장 암살 임무를 받고 떠났지만 애석하게도 실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네들은 아버지의 실패에 관한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든 증거는 여전히 기사단의 손 안에만 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려면, 흡사 손끝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몸을 뒤채는 느낌이 든다. 나는 암살단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강요했으며 무엇을 기대했는지 그저 막연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겠니?”
나는 기가 막혔다.
“당신들은 마치 실패를 예정하고 움직이는 사람들 같군요. 이러려고 저를 훈련시킨 건가요? 그간 제가 숨통을 끊은 일곱 명은 거룩한 복수극이나 웅대한 실패를 위해서 쌓아올린 주춧돌 같은 거였나요? 아버지가 죽었다는 증거를 가져와요. 아니, 기사단장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증거를 가져와요. 그것도 못하겠으면 아버지가 기사단장을 죽이고 싶어 했다는 증거를 가져와요. 전부 다 안 되겠으면, 기사단장이 죽거나 내가 죽으면 세계가 좀 더 아름다워질 거라는 증거를 가져와요. 아무 것도 못하겠어요?”
그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너는 할 수 있고, 우리는 너를 택한 것뿐이야. 정 네가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 하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최선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뻔뻔한 면상에 쏟아 부을 말이 수천가지는 넘게 떠올랐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는 과연 기사단장을 암살하고 싶었을까. 아내를 잃고 스스로 암살자가 된 후 자식에게도 암살 훈련을 시킨 사람이 떠올릴만한 최종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버지의 투쟁을 하찮은 복수극으로 마무리 짓고 내 손으로 그것에 종지부를 찍을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웅대한 영웅극으로 만들고 내 손에 세계를 구할 피를 묻히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암살단은,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기사단 스스로도 그런 결말을 좋아하겠지만- 남의 삶에 그런 식으로 간섭하는 것은 그가 누가 됐던 간에 몰상식한 짓이다. 더구나 그 사람은 내 아버지였다.
암살단 사람들은 내 완곡한 거부를 받아들이고 집을 떠나갔다. 나는 어머니가 그러했듯, 아버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버지가 실패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삶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아버지는 곧 내 기다림에 부응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그리고 이 뜻밖의 귀환 앞에선 나 역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마침내 아버지가 방에 들어와 불을 켰다. 나는 몸을 파묻었던 거실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외투를 현관 옷걸이에 걸던 아버지가 인기척을 느끼고 날 돌아봤다. 짧게 눈빛이 스치는 순간, 아버지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고 내 심장박동은 주체할 수 없이 격해졌다. 꼬박 삼 년 만의 부자 상봉이다. 인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손에 든 권총을 들어 아버지의 가슴을 겨눴다. 아버지의 동공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안녕하세요. 딴 생각 말고 손드세요.”
아버지는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나는 딱딱하게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요. 아쉽네요. 사실 나도 아버지 변명을 더 듣고 싶었는데… 못 만났던 동안 TV에서 들은 걸로 대신하면 되겠죠. 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고민이 많았어. 내가 왜 스스로 내 신뢰를 떨어뜨리는 그런 말들을 자초했겠니. 네가 실망할 건 짐작하고 있었다. 암살단에서 날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한 말들은 변명이 아니다. 진심이라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좋아요. 설명해 봐요. 아버지의 진심이란 건 이런 거겠죠. 스카이-스크레이퍼호는 외계인이 침몰시켰고, 그 외계인들은 지구인으로 변장한 채 세계 정 · 재계에서 암약하고 있으며, 기사단은 그걸 사전에 탐지하고 지구 방위와 안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간혹 인권탄압, 소수의견 묵살, 무고한 피해자 발생과 같은 피해가 있었으나, 이는 보다 큰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세계인은 기사단의 뜻 아래 단결해야 하며, 아닐 경우 지구는 머지않아 정복당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확한 정보를 밝힐 수는 없지만* 해왕성 궤도에서 처음 발견된 외계함대는 지금도 지구로 접근하고 있다. 맞나요?”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 자기가 틀렸다는 걸 알았나요?”
“…꽤 오래된 일이다.”
“어머니가 실종됐을 무렵이었겠죠? 그래서 그렇게 미안하고 겁났던 거죠? 부정확한 신념으로 자식을 위험에 빠트리는 게 미안했고, 언젠가 자신이 정말 틀렸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게 겁났고?”
“나는…”
아버지가 고개를 숙였다.
자기모순에 빠진 아버지가 자기모순이란 말조차 제 손으로 적지 못한 채 절필하고, 암살단에 몸을 의탁해서, 그럼에도 자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아버지가 기사단 기관보를 통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시작한, 그리고 이후 삼년간 지속된 뼈저린 고해에 근거한 상상이다. 아버지는 본래 글재주가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글에 진심이 담기자 그것은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의 귀환과 함께 반군은 깊은 타격을 입었다. 이것은 변절이나 배신 따위가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백을 받아들인 후에야 아버지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행동에 나섰다. 암살단은 내 결심을 못미더워했지만 한편으론 아직도 내가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한 것 같았다. 때문에 그들은 이 호텔을 장악하는 데에 암살단의 역량을 모두 기울였다. 대화를 나눌 시간은 넉넉했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구원을 요청하더라도 달려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짤막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용기 있는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 안에는 내가 더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겠죠. 제가 그걸 어떻게 다 알겠어요. 전 그냥 섣부르게 마침표를 찍는 일만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어머니가 그랬으니까.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저도 이런 걸 아버지한테 겨누는 짓은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기다렸겠죠. 돌아올 때까지. 혹은, 완전히 떠나갈 때까지…”
나는 말을 끊었다.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서,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너덜거렸다. 그 와중에 빨간 색 털실처럼 도드라진 말이 딱 한 가지 떠올랐다. 나는 맥락도 없이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의 대답엔 한숨이 섞여있었다.
“미안하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떤 정보를 수집해서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인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뼈아픈 자기 고백은 반만 들어맞은 셈이다.
확실히 외계함대는 지구로 오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저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사단은 이제 외계함대를 육안으로도 관측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보도 자료를 뿌려댔다. 그것은 반군을 향한 최후의 일격 같은 것이었다. 이 일격으로 반군 중 절반 정도는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다. 곧이어, 외계함대의 구체적인 관측 자료가 일반에 공개됐다. 모선(母船)으로 보이는 거대함선 열 두 척과 무수히 많은 자선(子船)으로 이루어진 외계 함대는, 뿌연 성운과 우주가스 속을 유영하며 저마다 보석과도 같은 노란 빛을 뿜고 있었다. 이들이 편대를 이뤄 미끄러지듯 지구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막을 수 없는 예술처럼 보였다. 관측 자료에 따르면 이들 모선 열두 척의 크기는 작게는 제주도 절반 크기에서 크게는 아이슬란드 크기에 달했다.
순응하던 자들이건, 반항하던 자들이건, 어떤 이를 막론하고- 세계는 할 말을 잊었다. 유일하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은 기사단장 뿐이었다. 그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폭포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카메라 셔터들을 향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비밀리에 준비해 온 지구방위계획이 있으며, 적의 수효가 아무리 많더라도 막아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기밀이 유지되어야 한다. 모든 군사계획을 섣불리 일반에 공개하기에는, 지구상에 적의 스파이가 너무나도 많다. 단상에 선 그의 노쇠한 얼굴에는 유독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나 압도적인 공포 앞에 사람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점이다. 기자회견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전 세계가 기사단의 지나친 비밀주의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동원할 수 있는 무력과 정치세력, 언론을 총동원하여 여론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 어떤 힘도 매일 밤 머리 위에서 불길하게 껌뻑거리는 수천 개의 노란 불빛이 뿜어내는 공포보다 압도적일 수는 없었다. 기사단은 자기 발목을 잡았다. 우리는 이십여 년 간 공포로 지구를 지배한 기사단의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했다. 다만 그것이 인류의 종말과 닿아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머지않아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성난 군중 수천 명이 기사단 본부를 무력으로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이 강제로 탈취한 기사단 기밀 정보가 기사단을 해체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놀랄 것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 반군들은 물론이거니와, 사실 이 무렵에는 거의 모든 세계인이 직감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기사단은 외계 함대를 막을 능력도 없었고 그러기 위한 계획을 세운 적도 없다. 이들은 대신 비밀리에 기사단 요인들과 세계 주요 인사들을 우주선에 태워 대피시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예정된 배신이 현실로 다가오고 반쯤 단념했던 희망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결국 전 지구가 분노했다. 세계 곳곳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고 몇몇 정부가 전복됐다. 실상 기사단의 ‘음모’ 에 반쯤 가담하고 있던 세계 주요 강대국에 대한 맹렬한 분노도 잇따랐다. 국가와 국가 간의 편 가르기는 세계 곳곳에서 소소한 군사적 분쟁으로 발전했다. 국제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인류는 외세에 의해 멸망하기 전에 전쟁을 벌여 자멸할 것처럼 보였다. 묘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암살단이 인류에게 경고했던 바와 동일했다. 정작 암살단원들은 대부분 깊은 혼란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다만 몇몇 암살자만이 암살자답게 순수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들을 정화하려면, 이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얼마 뒤, 기사단장은 해단선언을 하기 위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여러분의 공포를 느끼며 여러분의 분노에 공감합니다. 죄송합니다. 맞습니다. 기사단은 인류를 속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사단 해체를 선언하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십여 년 전 기사단을 창단할 때 했던 말과 동일합니다.
How can we win when *these* fools can be kings?
Don't waste your time or time will waste you.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
여러분, 저는 얼간이었습니다. 허나 여러분은 부디 현명한 길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인류라면 그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글쎄.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겠다고 말하다가도 어느 샌가 머릿속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그 안에 끼워 넣는다. 이들은 항상 너무 철딱서니 없이 낙관하거나 너무 힘없이 비관한다. 도무지 삶을 직시할 줄 모르며, 사랑할 줄도 모르고, 그렇기에 삶이 답변을 주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때 까지 기다릴 줄을 모른다.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내 눈에는 기사단장의 해단선언을 접한 세계인의 태도가 딱 그러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불필요한 무력충돌을 그만두고 ‘최대다수 인류 생존을 위한 탈출 프로젝트’ 를 지속 실행할 것을 지지한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쉽게 진행될 리 없다. 떠나서 살아남을 자들과 남아서 죽을 자들을 감별하는 역겨운 작업이 진행됐다. 투표가 시작됐고 약소국 시민 중 상당수가 버림받았다. 모든 나라에서 안팎으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지구 탈출자 재선정을 요구하며 군사력을 동원한 국가를 향해 ‘인류를 구하기 위한’ 무력행사가 개시됐다. 가까이 다가온 외계의 불빛으로 환히 빛나는 지구의 밤하늘 곳곳에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계전쟁이 시작됐다.
“…그렇게 된 거야. 생각해 보면, 바보 같은 짓이지.”
“이상해. 왜 아무도 그 함대가 지구를 그냥 스쳐갈 거란 생각 같은 걸 하지 못한 거야?”
“지구인들은 세계의 중심을 지구에 두고 있으니까, 자연스러운 거야. 외계인들이 있긴 있는데, 여기 지구가 있고 지구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는 걸 어느 누가 떠올리겠어? 더구나 매일 밤 불길한 불빛들이 번쩍거리는데. 그리고 내가 설명했잖아. 지구인들은 이십 년이 넘도록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들었다니까. 생각해 보렴. 심심할 때면 뉴스에서, 인간 얼굴가죽을 뒤집어 쓴 외계인이 등장했어. 누가 생각해도 아, 이놈들이 지구에 큰 관심이 있구나… 하지 않겠니?”
“잘 모르겠어. 그럼 지구를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아무도 그 사람들하고 통신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거든. 이따금 이산가족이 있긴 하지. 어머니가 타세요, 아니다 니가 살아야 한다… 눈물겨운 짓을 하다가 결국 찢어진 사람들도 있고. 하지만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떠나간 사람들을 되새기는 것조차도 싫어할 거야. 우리는 모두 살인자의 후손이다, 라는 말 들어봤지? 그런데 생각해봐. 그렇게 따지면 여기 남은 사람들은 모두 피살자의 친구들인걸.”
“아빠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아이를 향해 나는 피식 웃었다. 아이는 내가 오랫동안 암살자였다는 걸 짐작이나 할까.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쟁 속에서 암살단과 반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세계 곳곳의 반골들을 품어줬던 미스테리 서클의 복잡한 정치구조도 붕괴되어 버렸다. 우리는 여느 사람들처럼 다만 살아남기 위해 끝도 없는 절망 속을 헤맸다. 종말은 이미 예언된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있으리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떠날 자들이 떠나고, 밤하늘을 뒤덮은 노란 불빛들이 점점 커졌다가 이윽고 거짓말처럼 사그라졌지만, 한동안은 누구도 그들이 ‘애초에’ 지구나 인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패배하고 남겨진 자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상상력이 부족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떠난 자들은, 어쩌면 아직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얘기 몇 가지만 덧붙이자. 전쟁이 끝난 후, 나는 일반에 공개된 ‘떠난 자’ 들의 리스트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물론 그 사람이 진짜 아버지인지, 단순히 동명이인인지는 영원히 모를 일이다. 다만 나에게는 아버지를 확인 사살할 용기까진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딱 한 발만 발사한 뒤,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만 확인하고 자리를 빠져나온 게 내게 허락된 용기의 전부였다.
좀 더 재밌는 건 그 리스트에 어머니의 이름도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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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t and ParisJuliet and Paris
Posted at 2011/08/09 16:52 | Posted in 잡글들/소설영지로 돌아가기 전 날 밤이었다. 아버님은 나를 안채로 조용히 부르셨다.
“베로나에 가거든 너와 혼인을 맺기로 한 처자가 있을 게다. 캐퓰릿가의 줄리엣이라고 한다. 어른들끼리는 다 이야기가 된 참이니 가서 인사도 하고 혼인 날짜도 정했으면 좋겠구나. 요사이 봄날 볕도 좋으니 되도록 빨리 했으면 어떨까 싶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혼인이요?”
“그래, 혼인.”
“아버님. 저는 아직 결혼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나이가 찼는데 소식이 없으니 알아본 게 아니냐. 어차피 나중엔 나한테 감사하게 될게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제가 결혼할 사람은 제가 직접 정하겠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그랬지.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세상에는 자기가 원하는 때에, 사랑하는 사람과, 절실한 이유로 결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그거랑은 전혀 다른 얘기 아닙니까. 제 이야기는, 적어도 제 결혼 상대방은 제가 직접 정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엄청난 욕심을 부리는 겁니까?”
“당연히 엄청난 욕심이지. 왜인지 알고 있냐?”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일단 가보고 결정해. 그래도 안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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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버님이 약속을 했건, 안했건, 그냥 무시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니 나도 모든 책임을 아버님에게 돌려버릴 생각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결혼이 이렇게 해결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것을 우리 부자가 서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인 동시에 주군과 봉신이며, 피상속자와 상속자이지만 결국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 영주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단순한 선언이 아버님께는 단순한 독립선언을 넘어 퍽이나 정치적인 언사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로나로 향한 것은 조금은 현명하게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 여자인가? 베로나, 캐퓰릿 가문의 외동딸 줄리엣? - 나는 베로나로 향하는 내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하필이면 이 정체 모를 여인을 며느리로 삼을 생각을 하신 아버님의 속내를 파악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도통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일단, 캐퓰릿 가문은 아버님의 성내에 차는 명문가라고 할 수가 없다. 물론 베로나에서는 손꼽히는 상인인 모양이지만, 그래봐야 귀족은 아니었고, 가까운 베네치아나 피렌체만 가도 캐퓰릿 쯤이야 엄지손가락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만한 거상들이 넘쳐난다. 더구나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최근에는 사업도 그다지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이 가문은 평판도 그다지 좋질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같은 베로나 영내에 몬태규라는 가문과 불구대천 원수로 척을 진 모양인데, 태생이 장사치인 탓인지 척을 지는 방법도 칼부림, 주먹질, 패싸움 따위로 상당히 원초적인 편이었다. 주제에 돈은 어느 정도 버는 두 가문은 때로 무뢰배들을 고용해 저잣거리에서 크게 맞붙었다. 이런 날이면 온 영내에 곳곳이 찢어지고 깨지고 부러지는 부상자들이 속출했고, 두 가문과는 무관한 주민들도 어쩌다보니 동네 싸움에 말려들어 캐퓰릿이 잘했느니, 몬태규가 잘했느니, 따지다 보면 서로에게 공연히 눈을 흘기고, 백안시하는 일이 생기니 - 온 도시가 사사로운 싸움에 말려들어 시끄러워질 때면 결과적으로 가장 골치 아파지는 것은 베로나의 영주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백리 밖까지 안내할 사람을 보냈다. 약관의 백작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이는 집사를 맞이하며 나는 한없이 씁쓸했다. 이건 약혼도 결혼도 아니고 그냥 골칫거리 해결사일 뿐이잖아. 도대체 아버님은 무슨 생각인 거지?
“백작을 환영하는 뜻에서 오늘 밤은 캐퓰릿 공이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맘껏 마시면서 즐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제 정혼자를 먼저 만나봤으면 싶은데…”
“물론 줄리엣도 참석합니다. 하하. 정식 인사는 내일 낮에 하시겠지만, 오늘 연회장에서 직접 찾아보시는 것도 재밌겠군요.”
퍽이나.
베로나 성내에는 우리 일행을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천하의 깡패가문인 캐퓰릿가의 장녀를 무려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찾아온 신기한 백작을 직접 구경하려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캐퓰릿 가 저택을 향해 나아갈수록 구경꾼은 점점 늘어났고, 그럴수록 나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그저 구애를 위해 행진하는 늠름한 수컷으로 보일 뿐이었으니, 흡사 동물원에서 깃을 활짝 펼치고 걷는 공작새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임계점에 다다른 부끄러움을 이기자니 정신 줄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미소를 띄우고 손을 흔들었다.
저택에 들어서자 캐퓰릿 공은 가느다란 눈매에 실핏줄 같은 미소를 함뿍 담으며 종종걸음으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저택 내부는 연회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캐퓰릿 공의 몸짓에는 도저히 무시하거나 다른 무언가로 착각할 수 없는 깍듯함이 배어 있었다. 말하자면, 동화에 나오는, 사자에게 굽실대는 여우의 깍듯함 같은 것.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파리스 백작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내가 영광이오. 과연 아버님이 말씀하신 대로 키도 크고… 수려하시구려. 내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아서 참 기분이 좋소!”
나는 억지웃음을 좀처럼 들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번만은 자신이 없었다. 눈치 없이 껄껄대는 캐퓰릿 앞에서 분위기가 막 어색해지려는 찰나였다.
“아가씨!”
나는 괄괄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힐끔 돌렸다가, 저택 내부 회랑 기둥에 몸을 가린 채 얼굴 반쪽만 빼꼼히 내밀어 날 바라보고 있는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아마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 색깔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아찔할 만큼 찬란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고, 눈이 한 번 깜빡한 사이에 그녀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달려갔다. 밝은 대낮에 망막을 스친 태양빛의 흔적처럼, 흔들리는 그녀의 잔상이 머릿속 가득 어른거렸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 무엇을 들이대고도 맹세할 수 있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토록 찬란한 빛을 내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한밤의 별빛은 아마 그녀에게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동굴 속의 횃불은 그녀에게 더욱 따뜻하게 빛나는 법을 배워야 하겠지. 진정 아름다운 이는 그 이목구비의 조화로움을 논하기 이전에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슴 떨리는 빛으로 먼저 존재한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지상의 천한 말로 더럽혀지기 이전에 사랑의 제단에 먼저 올라선 미(美)의 화신에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쁜 마음으로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저 여인이 누굽니까?”
캐퓰릿 공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힐끔 쳐다보더니 당황한 듯 내 앞을 가로막으며 대답했다.
“허허, 이런. 큰 실례가 될 뻔 했소. 아마 신랑이 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오. 채비가 끝나거든 정식으로 인사할 기회를 드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시구려.”
“그럼 저 여인이…”
“맞소. 줄리엣이라오.”
기다림은 다소 길었다. 그건 누구나 알다시피 내 결혼이 그렇게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채에 시종들이 짐을 부리는 동안 캐퓰릿 공은 차를 대접했는데, 앉은 자리에서는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지만 그 뒤에 퍽이나 복잡한 속내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은 제발 알아달라고 홰를 치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였달까. 어쨌거나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캐퓰릿 공이 이 모든 문제를 확실히 마무리하기 전에는 줄리엣과 나를 인사시킬 생각이 없어보였다는 점이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건 고문이었다. 캐퓰릿 공과의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거의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약삭빠른 영감은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알고, 일부러 줄리엣을 그 자리에 내려 보냈던 게 아닐까? 어느 순간 더 이상 정치적 단어를 골라낼 정신이 없어진 나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아버님이 캐퓰릿 가의 빚을 변제시켜주는 대가로 뭘 요구하신 겁니까?”
영감의 입가에 박제처럼 굳어있던 미소가 조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더 나가기로 했다.
“말씀을 듣자 하니, 결국 두 어르신께서는 이 결혼을 매개로 해서 베로나 일대의 상권을 손에 쥐는 것을 목표로 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 저희 아버님은 캐퓰릿 가문을 앞잡이로 삼아서 베로나 자체를 손에 넣을 생각도 하신 것 같구요. 이 정도면 공에게는 충분히 입질이 당기는 조건 아닙니까? 만약 뭔가 내키지 않아서 거절하셨을 때, 우리가 저 몬태규 가문과 손을 잡는다면 어쩌실 겁니까. 제가 보기에 어르신은-”
“-그 이름은 여기서 거론하지 마시오. 나올 자리가 아니오.”
급속도로 굳어버린 영감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원수의 이름을 듣고 순간 분이 치민 영감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은 탓에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어찌됐건 지루한 자리를 일소하고 줄리엣을 부르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나에게도 이런 분위기는 달가울 것이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좀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평생을 약조할 배우자를 찾아온 젊은이가 어찌 사랑보다 먼저 지루한 정치놀음에 휘둘려야 한단 말입니까? 괜찮으시다면 줄리엣과 정식으로 인사할 자리를 마련해 주심이…”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자신하시오? 난 아내를 두 번 잃었소. 하지만 두 아내의 집안과 맺은 관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 사업 동지로, 때로는 정치적 동지로. 말씀하시는 걸 보니 본인의 결혼이 그렇게 순진한 문제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를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구려.”
영감은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보고서야 나는 정치적 가식을 죄다 털어놓았을 때 진정 불리해지는 게 내 쪽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쟁터 같은 이탈리아 한복판에서 라이벌에 맞서 가업을 지켜온 여우같은 상인과,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푹 빠져 몇 시간 이내로 그녀를 다시 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은 약관의 귀족 서생. 나는 최소한 마지막 속내까지는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말씀하시지요. 저희 아버님은 얘기가 다 끝났으니 저는 날만 정하면 된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 저희 아버님께 하지 않은 제안은 무엇입니까?”
캐퓰릿 공은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주위를 살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 제안은 이렇소. 아버님을 배반하시오. 그럼 베로나를 손에 넣게 해 주겠소.”
나는 단숨에 대답했다.
“좋습니다. 우선 줄리엣을 불러주십시오.”
대답이 너무 빨랐던 모양이다. 캐퓰릿 공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인가 꺼내려다가 문득 멈칫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아주 짧은 순간, 그 여우같은 영감의 눈빛이 내 가슴 깊숙한 곳을 칼날처럼 헤집고 지나가는 걸 느꼈지만,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영감은 예의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겠소. 방에서 조금 기다리시겠소? 딸아이를 찾아보지요.”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줄리엣은 연회에 입을 의복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타나지 않았고, 영감은 저녁에 있을 연회 준비로 바쁘다는 이유를 대며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사랑채 안을 서성거리며 내가 어떤 몹쓸 권모술수에 휩쓸린 건지 파악하려 애썼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먼 곳으로 달려가던 줄리엣의 잔상이 찬란한 빛이 되어 머릿속을 휩쓸어 버렸다. 캐퓰릿 공의 제안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요컨대 아버님의 세력을 배제한 채, 나를 내세워 베로나를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베로나의 영주가 되는 것이고, 캐퓰릿은 이곳의 진정한 실세로 등극할 것이며, 무엇보다 줄리엣이 내 아내가 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이지 않은가? 내가 무엇 때문에 망설여야 하지? 게다가 일단 줄리엣만 곁에 있게 하고 나면, 아버님과 캐퓰릿 공 사이에서 권력의 중심을 잡을 사람은 어차피 나였다. 결혼에 대한 확답만 얻고 나면 이후의 모든 일은 내가 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캐퓰릿 공은 해질녘이 돼서야 다시 사랑채를 찾아왔다. 나는 줄리엣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줄리엣이 곧 연회에 나올 것이라고만 말했다. 나는 나름 사태를 정리한답시고 더듬거리며 이야기했다.
“어르신,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일단 복잡한 문제는 결혼 날짜를 정한 이후에 논의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미 온 이탈리아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겁니다. 파리스 백작이 캐퓰릿 가문의 줄리엣과 곧 결혼한다고… 그러니 요란한 일은 먼저 해치우고 중요한 일은 요란하지 않게 처리하는 것이…”
영감은 껄껄대며 대답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급하다고 막 해치울 수는 없는 법 아니겠소.”
나는 의연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이 남에게는 시종일관 시무룩한 태도로 보였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연회 의상을 챙기는 내내 몸종이 왜 그렇게 죽상을 짓고 있냐고 몇 번이나 캐물었으니까. 캐퓰릿 영감은 사랑채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어둠이 깔린 하늘에 하얀 별들이 먼지조각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모두 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미 베로나의 사람들 중 파리스 백작의 풍채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만 내 시무룩한 표정과 시종일관 줄리엣을 찾아 두리번대는 눈빛이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따뜻한 술과 오색 과일이 즐비한 연회장 곳곳에 음악과 함께 은근한 바람이 불고, 평화와 한가로움이 내려앉았다. 베로나가 오랜만에 맛보는 귀족적인 평화임에 틀림없었다.
연회장에 직접 찾아온 영주는 나를 얼싸안으며 이 무뢰배들에게 예의란 것을 알려준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만 활약했다는 이 순진한 양반은 내 아버지나 캐퓰릿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놀라운 순진함이 내 정치적 감성을 일깨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저택 구석에 있던 분수대 근처에서 다시 한 번 줄리엣을 발견했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가린 보라색 가면 안에서도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조금 먼 거리였지만 어쩌면 당장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었다. 나를 붙잡은 것은 곁에 있던 캐퓰릿 공도, 영주도 아닌 줄리엣의 바로 앞에 있던 한 남자였다. 두 남녀는 꼿꼿이 선 채로, 서로를 가만히 마주보고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온 정신을 두 남녀에게 쏟았다. 그리고 둘은 자석처럼, 점점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입을 가져갔다.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왜? 어째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캐퓰릿 영감이 나를 속인 건가? 그녀는 애초에 다른 남자를 맘에 두고 있던 건가? 영감은 그걸 다 알면서 나를 이용한 건가? 그렇다면 저 남자는 누구지? 이건 특별한 술수인 건가? 질투심을 이용한 미인계? 아니면- 그냥 악몽인가?
둘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영주와 대화하고 있던 캐퓰릿 영감이 나를 힐끗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딸아이를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어디 보자… 지금 나와 있을 거요. 가면을 쓰고 있다지만 애비에게 그 정도야…”
“아, 이미 찾았습니다… 분수대 곁에 있더군요.”
“오, 그러셨소? 낮에 한번 스쳤을 뿐인데 기억력도 좋으시오. 허허…”
“그런데 곁에 있는 남자는 누굽니까?”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게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캐퓰릿 영감은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남자의 정체를 밝힌 것은 조금 뒤에 있던 영주였다. 그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몬태규 가문의 장자 아니오… 이름이 로미오였나? 하여튼, 오늘은 좋은 날이니 알아서 처신하리라고 믿소. 캐퓰릿 공.”
캐퓰릿 공은 잔뜩 짓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백작,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별일 아니니 금방 해결될 거요…”
영감은 황급히 사라졌지만 나는 차마 그에게 두 사람이 키스한 걸 보았느냐고, 묻지 못했다. 머릿속에 거대한 넝쿨이 자라나서 모든 생각의 길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면이 내 당황한 표정을 가리고 취기가 내 상기된 얼굴을 덮어버리길 기원하며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로 먼 곳의 줄리엣을 바라보고 있었다. 캐퓰릿 가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색이 느껴지자, 로미오는 주저하며 자리를 떴다. 다만 나는, 두 사람이 헤어지기 직전까지 짓고 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혼자 남은 줄리엣은 로미오가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나타난 유모에게 끌려갔다.
영주가 이상하다는 듯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백작. 너무 맘에 두지 마시오. 로미오는 평소 행실이 올곧고 성품이 바르기로 이름난 친구라오. 더구나 오늘 밤 분위기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감히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겠소? 그만하고 다른 곳으로 가봅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영주와 함께 연회장 곳곳을 거닐었지만, 솔직히 어떤 말도 귓속에 들어오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잠시 뒤에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영주 앞을 빠져나온 나는 그 걸음 그대로 저택 안채를 향해 걸어갔다. 줄리엣을 만나야했다.
안채 곳곳에 있던 시종들은 내 모습을 보고 놀라긴 했지만, 줄리엣의 방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한참동안 씩씩대며 걷고 있다 보니, 캐퓰릿 영감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쫓아와 뒤에서 소리 질렀다. “백작!”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영감은 난처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이거 미안하게 됐소. 백작을 위한 연회인데 내가 너무 나돌아서… 하지만 이 집안에는 몬태규의 씨앗이라곤 곱게 스치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말이오. 얼른 몰아내지 않으면 누가 나서서 잔치를 망칠지 모르는 일 아니겠소. 자자, 그만 하고 갑시다. 줄리엣은 곧 나오라 할테니…”
“어르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줄리엣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골치 아픈 이야기는 다 집어치웁시다. 어떤 요구를 하시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제 와서 그녀가 다른 남자를 품에 안는 일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영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남자를 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 표정과 말투로 봐서는 영감은 내가 본 걸 온전히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마 몬태규가의 장자가 줄리엣과 키스했다는 걸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는 게 현명할 리도 없었다.
“그게… 아무튼 줄리엣을 만나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가보겠습니다.”
나는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영감은 등 뒤에서 몇 번인가 나를 더 부르다가 이윽고 잠잠해졌다.
줄리엣의 방은 저택 뒤뜰을 바라보고 있는 2층에 있었다. 창밖으로 넓은 정원과 담장 너머 베로나의 뒷골목이 보이는 곳이었다. 방 앞에는 유모가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서 문을 두들겼다. “아가씨! 아가씨! 백작님이 오셨어요!” 줄리엣은 잠시 대답이 없었고,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미심쩍은 눈으로 유모를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유모는 내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쏘아붙였다.
“안에 누가 있소?”
유모는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지금 옷을 갈아입으시는 중이라 조금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 백작님이 오셨다니까요! 지금 어서 나오셔야…”
유모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줄리엣은 연회 때 입었던 드레스 차림에, 머리를 풀어 헤치곤, 나와 유모를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실례하겠소. 유모는 가 봐도 좋소.” 모두가 경황이 없던 탓에 나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나와 줄리엣만이 남았다. 줄리엣은 뒷걸음질로 침대에 다가갔다. 그녀의 등 뒤로 커다란 창문이 열려, 달과 별들이 바람을 타고 새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어 줄리엣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파리스 백작이오. 무례를 용서하시오. 낮에 잠시 눈빛이 스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소?”
잠시 창밖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당황해하던 줄리엣은 이윽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백작님.”
“그토록 강렬한 순간을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소. 그 찰나만으로도 다시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소. 당신의 목소리는 어떠할지, 살결은 어떠할지… 당신께 바쳐질 모든 맹세는 오늘 당신을 다시 만난 이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완성되었으나,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내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도록 하겠소.”
“심장 깊은 곳에서 금은보화와 함께 꺼낼 맹세라면 제가 언제쯤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백작님과 저는 이미 혼인하기로 한 사이이니 그 때가 되어서 주님 앞에 맹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줄리엣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나에게는 당신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시오?”
“사람의 마음은 권력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내 돈으로 당신의 마음을 사겠다고 한 적이 없소.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 내 가슴 속에 새긴 맹세를 바치겠다 했지-”
“사람의 마음은 쉽게 다치고 아물며 변덕스럽게 변하는 것이니, 제가 어찌 그걸 믿겠습니까.”
“그렇다면 저 빛나는 달에 대고 맹세하겠소.”
줄리엣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달은 쉽게 차고 기울며 변하는 것이니, 당신의 사랑도 그와 같다는 뜻이겠군요.”
“좋소. 그럼 무엇에 대고 맹세하면 좋겠소? 어찌하면 당신이 내 마음을 믿어주겠소?”
“백작님. 아직 뭐가 문제인지 모르시고 있군요. 제가 당신의 마음을 믿고, 받아들이더라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당신의 선택이 아니라 저의 선택이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당신의 선택을 얻어내고야 말겠소. 그것이 불가능하오? 내가 지금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소?”
줄리엣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듣던 대로 자신만만하시네요. 백작님, 저는 이미 당신의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당신이 저의 사사로운 선택에 이렇게나 연연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본래 사랑하는 마음이란 영혼을 바치고 죽음을 걸고도 쉽사리 얻어낼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고귀한 법이지요. 금은보화와 세속의 권력으로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하룻밤에 흩어져버릴 헛된 맹세와 가벼운 입놀림으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줄리엣. 나는 내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소. 헛된 맹세와 가벼운 입놀림이 아니라!”
“저 역시 당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백작님은 백작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걸 모르시는 건가요? 백작님이 진정 절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지옥에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다 한들, 그게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만 두세요. 아름답고 가치 있을 것만 같은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시들어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가혹한 운명에게 놀아나고 있을 뿐이죠. 잃을 것이라곤 이 허약한 목숨밖에 없는 저보다 많은 것을 가지신 백작께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밤이 깊었네요. 돌아가세요. 가엾은 분.”
줄리엣은 나를 등지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창밖의 별 만큼이나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유영했다. 나는 침을 삼키고, 이마를 쓸어 넘기며, 한참을 주저했다. 확답을 듣지 못했을 뿐, 줄리엣의 마음은 이미 명백한 것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그것이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쓸데없이 덧붙은 얼룩처럼 보일 것이다.
그걸 충분히 알면서도 나는 결국 견딜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묻겠소. 내가 아니라면, 그 자를 사랑하오?”
줄리엣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날, 베로나의 밤은 풍성한 음악과 빛나는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채로 돌아온 나는 몸을 뒤채며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았지만, 하루가 다 가도록 사랑채를 벗어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바깥에서 줄리엣을 다시 마주쳤을 때 무슨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온종일 침대에 앉아 있다가 사랑채 뒤뜰을 서성거리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자니, 먼발치서 시종들이 날 쳐다보면서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젯밤 내가 줄리엣을 만났단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니, 뭔가 그럴싸하고 재미난 이야기라도 만드는 중인 것 같았다. 그 중 몇 가지가 캐퓰릿 영감의 귀에 들어갔는지, 오후 들어서 영감이 잔뜩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직접 사랑채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물었다.
“백작. 무슨 일 있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냥… 어제 좀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베로나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내 집안에서 넋이 나가 있다는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소? 어젯밤에 줄리엣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요? 혹시 맘에 들질 않는다거나…”
“뭐 어젯밤 일이야 줄리엣에게 직접 물어보시면 될 일 아닙니까.”
캐퓰릿은 입맛을 다셨다.
“딸아이는 아침 일찍부터 고해를 한답시고 성당으로 달려갔소. 내가 느끼기론 분명히 어젯밤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둘 다 얘기해 주기를 싫어하는군. 아무튼, 알겠소. 그럼 두 사람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하면 되는 거요? 우리가 어제 나눴던 이야기도 모두 유효하고?”
“저에게는 유효합니다.”
영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다른 사람 누가 더 있다는 건지…”
“누가 더 있겠습니까?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하는 것인데요.”
잠자코 듣고 있던 영감은 입을 딱 벌렸다.
“줄리엣이… 다른 소리를 하오?”
“사실 가장 먼저 그 의견을 들어봤어야 했던 사람이지요. 전 아직 모르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기는커녕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보다보면 드는 게 정이고 피어나는 게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속에 내가 없다는 걸 먼저 알고도 그게 가능 할까요?”
“이 무슨 바보 같은… 알겠소. 오늘 왜 종일 힘이 없었는지 이제야 알겠구려. 내가 줄리엣과 얘기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겠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것은 운명의 장난이고 줄리엣의 선택이니 누군가 옆에서 강제한다 하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요. 일을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지금, 오히려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저인 것 같습니다. 그 선택지에 제가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입니다…”
“그래, 뭐… 백작이 정신을 차리는 게 먼저라는 점에는 동의하오.”
영감은 떨떠름하게 이야기하고 줄리엣을 만나보겠다며 사랑채를 떠났다.
또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서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문득 하인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 사람을 불러 세웠다.
“거기 무슨 일이오?”
그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개 같은 몬태규 놈들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티볼트님이 돌아가셨어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이 두 가문의 본색인 모양이다. 죽고 죽이고 다치고… 어젯밤 이곳에 깃들었던 짧은 평화가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영주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왜 그리 기뻐했는지 새삼 실감나게 알 것 같았다. 저택 정문서부터 웅성대며 모인 캐퓰릿의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몬태규 가를 향해 달려갈 듯 불같은 살기를 내뿜어댔다. 이래서야, 금방 사람이 죽었다는데 결혼 이야기를 진지하게 꺼내기도 애매한 일이었다. 어쩐지 머쓱해진 나는 한 사람을 더 붙잡고 물었다.
“그래서, 그 칼을 휘둘렀다는 망나니가 누구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 혹시 아시오?”
그는 길거리에서 직접 티볼트의 죽음을 목격하고 돌아온 사람인 것 같았다. 시뻘건 눈으로 쉴 새 없이 자신이 목격한 바를 떠들고 있던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백작님! 이를 어쩝니까? 사촌 오빠를 저 개자식들의 손에 잃었으니, 아가씨의 상심이 보통이 아닐 겁니다. 백작님이라도 가서 위로를 해 주셔야…”
나는 좀 더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그래서 범인이 누군지 묻고 있지 않소. 어서 말해보시오.”
“그 썩을 놈을 잡아오시게요? 이름은 로미오라고 합니다. 몬태규 가문의 장자 되는 녀석이지요! 이미 영주님이 체포령을 내리셨고 베로나 밖으로 도망간 상태입니다. 근방 백리로는 들어오는 즉시 사살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운명의 장난질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경우엔 말이 좀 달라질 것도 같다.
유모는 줄리엣의 방문 앞을 완강히 막아서곤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씨가 너무 울어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나로선 줄리엣과 유모 사이에 뭔가 더 구체적인 약속이 있었던 것만 같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캐퓰릿 공을 직접 부르겠다는 협박이 몇 차례 이어지고 나서야 유모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나는 최대한 정중히, 줄리엣의 방문을 두들겼다. 약간의 휴지 뒤에, 울음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돌아가세요.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줄리엣. 파리스 백작이오. 지금 많이 힘들 걸로 알지만 꼭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소.”
“무례하시네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나는 곁에 서 있는 유모에게 눈짓을 해서 몇 걸음 물러나게 한 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내일 떠날 생각이오. 그리고 줄리엣, 당신이 원한다면 이 결혼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이야기 해 보고 싶은데. 계속 이렇게 바깥에만 세워두는 건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구려.”
나는 잠자코 줄리엣의 선택을 기다렸다. 줄리엣이 내 짧은 말에서 어떤 그림을 연상했는지,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줄리엣의 방문은 예고도 기척도 내지 않고 열렸다. 나는 조용히 방 안에 들어갔다.
줄리엣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울다 지쳐서 사람을 볼 수 없다는 말은 진짜인 것 같았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온통 하얀 천을 두른 채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흡사 슬픔의 여신 같은 풍모로 넋이 나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침울하게 말했다.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그럴수록 요란한 일은 어서 처리해야 하지 않겠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캐퓰릿의 사람이, 제 오라버니가 죽었습니다만, 이런 일이 백작님의 구혼을 좌절시킬 만큼 중대한 사안은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흔하고도 익숙한 일일 뿐이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신다면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될 겁니다. 아버님의 뜻이 그러하고, 백작님의 뜻도 그러하시니…”
“내가 궁금한 것은 줄리엣, 그대의 뜻이오. 나와 결혼할 마음이 있소?”
“그에 대해선 지난밤에 충분히 말씀 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로미오를 아직 사랑하시오? 그가 그대의 오라버니를 죽였는데도?”
“그걸 직접 보셨나요? 로미오의 칼이 티볼트의 몸을 꿰뚫는 걸 두 눈으로 보셨습니까?”
줄리엣의 눈에 전에 없던 힘이 피어올랐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범인은 로미오가 아니란 거요?”
“로미오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고, 오해는 시간이 가면 풀리기 마련입니다.”
“지금 로미오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고 있지, 그렇지 않소?”
줄리엣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제 천박한 사랑을 조롱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단지 자신을 끝없이 비참하게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다른 말씀을 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나가 주세요. 제 곁에는 백작님이 없어도 충분히 골치 아픈 일이 많습니다.”
줄리엣은 그 말만을 남기고 침대에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하오, 줄리엣.”
방안이 고요했다.
“첫 번째 제안은 이렇소. 당신이 로미오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준다면, 나는 그가 누명을 썼다는 걸 믿고,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해 주겠소. 비록 당장 베로나로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이탈리아 어딘가에서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책임지고 마련해 주겠다는 뜻이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운이 좋다면 어쩌면 베로나로 돌아와서 살 수도 있겠지. 다만, 이 모든 경우에 당신은 정해진 대로 나와 결혼해야 하고, 다시 로미오를 만나는 건 용납할 수 없소. 그리고 다만 그를 마음속에 두는 것도 용납할 수 없소. 내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다만 혼자서 마음속에 칼을 갈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잔인한 대가라도 치루겠다는 뜻이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
줄리엣은 분명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그녀의 뒷모습을 눈여겨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당신이 끝까지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 로미오, 혹은 그의 약속만을 믿은 채, 지금처럼 홀로 방안에서 나에게 마음을 닫고 있는 경우요. 나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소. 당신 아버님, 혹은 그 누구와의 약속도 모두 없던 일로 한 채, 그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당신을 떠나겠소. 다만!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건데 로미오는 살아남지 못할 거요.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그 자에게, 무고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소. 이탈리아는 아주 넓으니 내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으리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소. 그 자는 나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었으니…”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의 선택만이 남았소.”
먼 곳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티볼트의 사체가 저택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텅 빈 방에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음울하게 번져가는 것을 무심하게 느끼고만 있었다. 줄리엣은 몸을 일으켜 나를 등지고 창을 향해 앉았다. 바람에 휘청일 듯 가냘픈 몸을 감싼 하얀 옷가지가 호숫가의 갈대처럼 축 늘어졌다. 그녀는 길게 한숨지었다.
“백작님. 당신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라 하시는군요.”
“당신이 내게 준 선택도 그러했소. 포기하고 떠나가거나, 사랑하지 않는 자와 함께하거나.”
“이렇게 하셔서 당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제게 이리도 가혹하게 구시나요?”
“그렇게나 무의미한 말도 드물겠군. 내가 잔인하오? 내가 당신에게 할 말도 같소. 자, 어쩔 거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오?”
줄리엣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먼발치서 들려오는 곡소리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그녀는, 소리가 회랑을 돌아 안채 가까이 다가오자 결심한 듯 울음과 침을 함께 삼켰다.
“알겠습니다. 로미오를 살려주세요.”
나는 나도 모르게 허파에 몰린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저희는 애초에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여린 탓에, 알면서도 입밖에 내어 말하기가 두려웠을 뿐이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저를 향한 당신의 믿음이 이리도 약하고, 로미오를 향한 당신의 증오가 그리도 큰데, 함부로 그 행방을 알려드릴 수야 없지요. 아버님과 말씀하셔서 혼인날을 잡도록 하세요. 일을 치르고 난 뒤에 행방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미오도 자초지종을 알고 나면 모든 일을 기쁘게 수긍할 것입니다.”
“당신이 상식적인 사람이어서 기쁘오.”
나는 줄리엣의 등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캐퓰릿 영감은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지만, 목전에 닥친 일부터 정리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었다. 우리의 결혼식은 다가올 목요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며칠 사이 조금은 밝아진 마음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 줄리엣은 나에게 감사할 것이다. 적어도 로미오가 살 수 있는 길은 열어줬으니까. 나 역시 그녀가 한 번에 마음을 바꾸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고, 가깝고 편안한 것과 멀고 어려운 것을 구분하여 하루 날이 샐 동안 큰 원한과 큰 사랑을 쌓기도 하는 것이니, 언젠가 그녀도 나에게 마음을 열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그녀의 마음을 살 수 있으리라. 가혹하고 변덕스러운 운명의 장난 같은 것에 기대지 않은, 오롯이 내 선택으로 열리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랑의 열매. 나는 아름다운 상상과 함께 이윽고 화창한 목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줄리엣은 그녀의 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녀와의 약속을 발설한 적이 없다. 때문에 모두들 줄리엣의 자살은 티볼트의 죽음이 원인일 거라고 말했다. 사촌오빠의 죽음이 연약한 소녀의 마음에 이겨낼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비록 캐퓰릿 가의 어느 누구도 ‘견디기 힘든 슬픔을 이겨내는 동시에 혼인을 준비해야 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 모두가 이 말을 목구멍 속으로 삼켜 커다란 울분으로 남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하나 더 가지고 있던 나는 몹시 우울했다. 더는 캐퓰릿 가에도, 이 도시에도 머물 면목이 없었다.
나는 곧장 캐퓰릿 영감에게 가서 영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며칠 새 닥친 커다란 비극들에 짓눌려 넋이 완전히 나가버린 표정을 짓고 있던 영감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소. 미안하게 됐소. 저 못된 몬태규 놈들 때문에…”
하지만 이것은 운명의 장난 같은 게 아니었다. 줄리엣은 나의 구혼에 대해 직설적이고 확실하게 대답한 것이다. ‘나는 죽어도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겠다.’ 누구나 살다보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로 죽어버리는 방법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는 아마 쉽사리 겪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슬프기보다 매우 어이가 없었으며, 믿을 수가 없었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내 선택권 밖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선택이 아닌 것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무책임하고 모호한 단어로 있었던 일을 호도할 생각 따위는 없다. 이 죽음은 명백히 ‘줄리엣의 선택’ 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강제하려 했던 내 욕심을 향해 보내는 준엄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나는 몹시 우울했다. 내가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말했던 아버님의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혹시 아버님은 줄리엣이 나를 이토록 격렬하게 거부하리란 걸 미리 알고 계셨던 걸까?
나는 줄리엣의 장례가 끝나는 대로 도시를 뜨기로 했다. 이렇다 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대로 도망칠 순 없었다. 죄수처럼 사랑채에 갇혀 멍하니 창밖만 지켜보고 있노라니, 지난 며칠간 겪었던 일들이 그림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조리 꿈같은 일들이었다. 다시 영지로 돌아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 도통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만난 건, 내 마음이 어떤 계산도 섞이지 않은 진심일지언정 자신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열 수는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어둠 속에서 별빛보다 환히 빛났고, 무르익은 봄날보다 찬란했던 그녀는, 죽음을 통해 죽어도 내가 싫다고 이야기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랑과 증오의 문제를 떠나서 이렇게까지 잔인한 짓은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난, 줄리엣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장례식을 기다리는 동안, 시종 몇을 영지로 급파해 베로나 인근에서 로미오를 찾아볼 것을 지시했다. 줄리엣의 죽음은 이미 몬태규가에 알려졌고, 어떻게든 로미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로미오라면, 아마도 줄리엣의 죽음을 전해 듣는 순간 무슨 수를 써서든 베로나로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사랑했던 이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서. 이것은 그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살펴보는 척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말해 그가 줄리엣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읽을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로미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용서할 것이다. 아마 로미오도 어딘가에서 다른 짝을 만나 편안한 여생을 살아가겠지. 하지만 로미오가 돌아온다면, 그런 방법으로 끝끝내 자신이 내 사랑과 좌절의 마지막 걸림돌이었음을 시인한다면 – 나도 거기에 응분의 응답을 해 줘야 할 것이다. 자신의 부주의한 칼놀림이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남길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나는 정성스레 갈아놓은 칼을 차고 베로나의 성당을 찾아갔다. 신부는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어쩐지 허둥지둥 대는 느낌이었다. 나는 고해소로 들어가 딱딱하게 말했다.
“신부님, 사람을 죽일 계획입니다.”
신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몬태규의 로미오란 녀석입니다. 신부님은 모르시겠지만, 이 녀석은 줄리엣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저와 줄리엣의 혼인이 정해진 이후에도 줄리엣의 마음은 줄곧 로미오에게 가 있었습니다. 놀라셨지요? 세상사람 모두가 모르더라도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줄리엣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요.”
고해소 뒤편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모른다 하더라도 나는… 주님은 알고 계신다오. 백작… 부디 허튼 일은 하지 마시오.”
“나는 본래 성당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운명이니 주님이니 하는 말들도 좋아하질 않아요. 선택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장난도 사람이 치는 것이며 단죄도 사람이 하는 것이지요. 허니 오늘 여기 온 것도 다만 내 마음을 편히 하고 다짐을 보다 굳게 하기 위해서란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내가 뭐라 하든 로미오를 죽일 거란 뜻이군.”
“예. 다만 그 녀석이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거나 내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굳이 찾아내서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멀리멀리 도망가서 내 눈에 띄지 않을수록 줄리엣을 향한 녀석의 사랑이 얼마나 값싼 것이었는지 증명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오늘 밤에 있을 장례식에 녀석이 그 뻔뻔한 얼굴을 들이민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열이 올라서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부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내가 할 일이 없군. 백작, 죄는 사람이 짓되 용서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오. 당신이 더 이상 죄짓지 않기를 기도하겠소.”
“그거 좋은 말이군요. 로미오가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럼 주님께선 내 좁은 마음도 용서하고 로미오도 용서하시는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러지. 주님께서 굽어살피사, 로미오는 나타나지 않을 거요.”
좀 이상하지만, 신부의 단언이 어쩐지 단순한 믿음처럼은 들리질 않았다. 나는 고해소 안에서 잠시 팔짱을 끼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진심으로 로미오가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더 많은 피를 뿌리기엔 이 도시는 너무 좁다.
저녁이 되자 비가 내렸다. 장례는 조용히 진행됐다. 캐퓰릿 일족 수십 명이 줄리엣의 관을 앞세워 공동묘지로 행진하는 동안 적지 않은 마을 주민들이 길가에 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자살한 자의 장례인지라 신부도 참석할 수 없었는데, 애도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캐퓰릿 영감은 비통한 표정으로 이따금씩 내 부축을 받아가며 행렬 제일 뒤쪽에서 줄리엣을 따랐다.
땅을 파고, 하관이 끝나가도록 로미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미오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던 신부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줄리엣이 죽기 전에 신부를 자주 찾아갔다 하니, 어쩌면 신부는 줄리엣, 혹은 로미오의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른편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꼭 쥔 손에 힘이 풀려갔다. 어쩐지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하룻밤 불장난에 불과한 마음이었나? 이렇게나 가볍고 부질없는 마음을 위해서 당신은 목숨을 던진 거란 말인가?
해질 무렵 시작된 장례가 끝나자, 사방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자고 이야기하는 영감에게 나는 잠시만 이곳에 남겠다고 이야기했다. 로미오가 어딘가에서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줄리엣과 그런 그녀가 목숨을 던져가며 사랑했던 로미오라면,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다. 모두가 돌아가고, 나는 비에 젖은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둠이 깔린 묘지 위로 스산한 침묵이 밀려왔다.
그리고 멀리서 희미한 등불 빛이 나타났다.
나는 숨을 죽였다. 등불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줄리엣의 무덤 가까이 다가왔다. 이윽고 무덤가에 정지한 등불에 비친 사람의 실루엣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는 삽을 들고 있었다. 무덤 앞에서 한참을 뭐라고 중얼거린 뒤, 그는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놈이 벌이는 짓을 지켜봤다. 흐느끼듯 흩날리는 빗방울 속에서 한참동안 혼자서 땅을 파던 그는 이윽고 땅 위로 관을 끌어냈다. 진흙 진창에 뒹굴어 엉망이 되어버린 녀석은 관을 뚜껑을 열어젖히더니 줄리엣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입을 막았고, 녀석은 순간 짐승처럼 오열했다. “줄리엣-!”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칼을 꺼내 들고 녀석에게 달려갔다.
“이 배워먹지 못한 살인자 녀석, 지금 뭐하는 거냐!”
빗속에서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린 녀석은 로미오가 맞았다. 광기에 젖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로미오는 몸을 일으키더니 칼을 뽑아들고 내 앞에 똑바로 섰다. 이 생각지도 못한 뻔뻔함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뻔뻔하게 줄리엣을 버린 것으로 모자라 마지막 안식도 방해하는 놈이?”
로미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에게도 우리를 막아서야 할 이유가 있겠지. 모든 것은 운명의 장난일 뿐이니- 나는 다만 아름다움을 사랑했을 뿐, 나를 탓하지는 마시오!”
그리고 매서운 칼날이 날아왔다. 피할 사이도 없이, 가슴팍에 아찔한 고통이 전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나는 진창 속에 무릎을 꿇은 채 풀린 눈으로 로미오를 올려보았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로미오의 얼굴에 아마도 내 것임에 틀림없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가슴을 막아보려 했다. 차가운 빗방울과 뜨거운 핏줄기가 손끝으로 튀어들고, 덜덜 떨리는 손아귀에는 날카로운 금속이 만져졌다. 가슴을 관통한 모양이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내가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녀석을 죽일 수 있다면 녀석도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녀석의 칼이 내 가슴을 꿰뚫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허탈한 기분이었다. 또 착각한 것이다. 나에게 모든 선택권이 주어져 있으리란, 순진하고도 순진한 착각.
내 얼굴을 살피더니 로미오의 낯빛이 변했다.
“당신은…?”
아버님이 옳게 생각하신 거다. 나는 얼마나 겸손하지 못했나. 왜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건가. 모든 것을 알게 되니 이젠 때가 너무나 늦고 말았다. 줄리엣이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려면 애초에 내가 이곳에 와선 안 되는 것이었겠지. 아냐, 사실 내가 없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당신들의 사랑은 쉽게 이뤄질 순 없었겠지. 나는 베로나에서 지낸 며칠 동안 내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입가에서 웃음이 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 고민했던 걸까? 내 마음이며, 선택이며, 준비며…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는데.
로미오에게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울혈이 밀려나왔다. 나는 피를 토하며 무너졌다. 당황한 로미오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마지막으로, 줄리엣을 보고 싶었다.
(2011. 8. 9)
* 뒤로 갈수록 노동이 되어버린 소설..; 수정도 나중에 해야지.; 힘들어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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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이게 얼마만에 보는 소설인가!
그런데 펼치면 글씨체가 달라져서 가독성이 순식간에 떨어지네.ㅠㅠ
일단 수정을 예고했으니 수정후 보겠어~-
2011/08/10 17:44 [Edit/Del]어 제가 보기엔 멀쩡한데; 이상하네요
근데 결국 이러다가 수정 안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 다시 썼음 다시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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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of DreamInside of Dream
Posted at 2011/05/13 02:50 | Posted in 잡글들/소설I.
꿈을 꾸었다. 네가 죽는 꿈이었다. 인도양 상공을 이만 오천 피트에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 네가 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하늘과 검고 고요한 바닷물의 경계에서 모종의 신호처럼 반짝이는 규칙적인 불빛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마치 사방이 스크린과 침묵으로 가득한 우주적인 영화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발밑에는 구름이 깔리고 고개 위로는 달이 빛났다. 이상 난기류나 포악한 기상현상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한밤의 비행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아름다울 고요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불안함을 내포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거대한 풍경에 내팽개쳐진 내 마음은 그 중간쯤에 서 있었다. 내 마음은 스스로 만들어 낸 꿈속에서도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했다. 나는 그 무력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풍경은 내 무력함과 관계없이 서서히 비행기를 향해 클로즈업을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 그 위에 떠 있는 구름들, 그리고 정지된 듯 수백 노트의 추력을 내뿜는 제트엔진, 그런 것들이 흘리는 규칙적인 소음이 마침내 귀에 들릴 무렵, 나는 너의 집에 있던 낡은 냉장고를 떠올렸다. 너는 유독 잠귀가 밝았다. 신경이 예민해진 날이면 새벽녘 웅웅대는 냉장고 소음에도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깨어나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흐느끼기도 했다. 내가 너의 숨죽인 흐느낌을 얼마나 많이 껴안아 줄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모든 것이 발하는 빛과 모든 것이 내는 소리가 유독 거대한 의미로 다가오는 그 새벽에, 초라한 추방자처럼 잠에서 깨어나 하염없이 잠든 이들을 내려 봐야만 했던 거대한 고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냉장고 소리를 내는 비행기 안에서, 너는 수면안대를 낀 채 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필연처럼 잠들지 못한 너의 미세한 뒤척거림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마 나뿐이었을 것이다. 수면등만 켜진 어두운 비행기 안에서, 너를 제외한 모든 승객들은 거짓말처럼 곤히 잠들어 있다. 너는 귀마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나지막한 소음을 견디지 못해 몸을 조금씩 움찔거리다가 기어코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기체 허리춤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more..
내가 꿈에 대해서 설명하자 너는 놀라기보다는 기분나빠하는 눈치다. 출장계획을 취소하거나 바꾸면 안 되겠냐는 나의 말에 너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대답을 다시 집어넣으며 억지미소를 지어 보인다. “걱정 말아.” 너의 대답은 모두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저 예상된 진행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꿈이 너무 생생했다. 너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고 한밤중의 인도양을 날고 있었으며 비행기는 모종의 이유로 폭발했다. 그리고 너는 열흘 뒤에 촬영차 아프리카로 출장을 떠날 예정이었으며 아마도 비행기는 한밤중의 인도양을 날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모든 상황이 이토록 맞아 떨어지는 꿈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깊어갈수록 너 역시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 한 번 더 던진 내 간곡한 부탁에 너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기더니 내 손을 잡으며 대답한다. “아무래도 그럴 순 없어.” 나는 알고 있다. 너는 나를 처음 만나던 날부터 아프리카로 떠나기 위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 혼자서 오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는 것은 너의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보다는 단순히 오래된 꿈에 가까운 일이었다. 너는 한 손에는 캠코더를 들고 한 손에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끝도 없이 펼쳐진 노란 색 초원을 달리고 싶다고 말했다. 수천 개의 별이 쏟아지는 사막 한 가운데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또 땅을 바라보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서 있고 싶다고도 이야기했다. 상상만 해도 황량한 그 땅의 어느 부분이 너의 맘에 들었던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너는 다만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세상과 세상을 잇는 문으로 가득한 세상을 생각해봐. 끝도 없는 세상 곳곳에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는 거지. 거기가 세상들의 중심이야. 나는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서 세상들의 중심으로 가는 거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니?
나는 아프리카는 다만 이곳과 다른 위도와 다른 경도에 위치한 다른 대륙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거기에는 문도 없고 다른 세상도 없겠지만 다만 네가 여태껏 보지 못한 것들은 좀 많이 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너는 나를 답답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자신의 말이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그래서 캠코더를 가져간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곳에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 그것을 캠코더를 통해서 찍어오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풀 HD로. 나는 너의 자신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원이동이나 평행 우주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야, 지금?” 너는 고개를 숙여 내 눈을 피하더니 창문 밖의 빌딩을 한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는 사람은 지금 우리랑 같은 세상에 있는 걸까?” 저녁이 다가오는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 안으로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채 복사기에 다가가고 있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저 사람 알아?” 내가 물었다. 너는 피식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너와 헤어진 나는 그저 네가 가벼운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사람은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 밤, 나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더 생생했고 더 길었다. 폭발한 비행기는 두 동강이 나서 바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너는 폭발음에 놀라 잠에서 깬 사람들보다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마 비명을 질렀더라도 아무도 네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 하늘 사이로 천 갈래의 바람이 네 얼굴을 찢어버릴 듯 두들겼다.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려와 너와 네 주변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미친 듯 헤집어 허공으로 내동댕이쳤다. 너는 안대조차 벗지 못했다. 눈을 꼭 감으며 좌석 손잡이를 간절하게 붙잡은 너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너의 입모양에 정신을 집중했다. 냉장고, 이 썩을 냉장고. 그래 네가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난 나는 너를 다시 찾아갔다. 집에서 여행 책자를 읽고 있던 너는 내 갑작스런 방문과 더 지독해진 꿈 이야기에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끝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다툼 끝에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킨 채 나를 피하는 너에게 나는 무릎을 꿇었다. 제발 가지 마. 이번엔 진짜 아닌 것 같아. 너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쾌한 침묵이 너의 방을 가득 채웠다. 대낮이었지만 냉장고 소음이 유독 귓가에 가까이 들려서 나는 한층 더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소음을 공간과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나는 되지도 않는 말들을 기관총처럼 떠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는 아마도 내가 내뱉은 말 중 상당수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모든 말이 그토록이나 차분한 한마디를 준비할 수 있었겠지. 내 모든 말들은 하나같이 과녁을 빗나가고, 너는 단 한마디로 내 심장을 꿰뚫었다.
“미안해.”
“알면 가지 마. 이번엔 진짜 아니라니까!”
“하지만 가야 돼. 너도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너의 말이 너무도 확신에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더 이상 너를 말릴 수 없었다. 너는 무릎 꿇은 나를 일으켜 꼭 안아주고는, 돌아오게 되거든 세상의 문이 열리는 장관을 꼭 보여주겠노라고 날 달랬다. 나는 덜덜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너는 처음 내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어쩌면 나를 처음 만날 때부터, 결국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그저 가야 한다고만 이야기했지,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 따위는 한 적이 없었으니까. 너는 날 교묘하게 속여가며 결국 그 비행기에 탑승했다.
인도양 상공을 비행하던 비행기는 폭발했다. 아랍 계열의 테러조직이 벌인 일이라는 뉴스가 뒤따랐다. 나는 실종자 명단에서 네 이름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했다.
Ⅱ.
꿈. 꿈이었다. 네가 살아있으니 그건 꿈이었다.
- 많이 놀랐니?
너는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머뭇거릴 뿐 너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너는 열 발자국쯤 바깥에, 노란 풀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 한가운데에 바람처럼 흩날리는 옷가지를 입고 서 있었다. 그것을 옷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다만 몸을 절묘하게 가리고 있는 반투명한 천 조각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은 파란 빛으로, 구름 한 점 엉기지 않은 채 쨍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꿈일 뿐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서 대답했다.
- 꿈이잖아.
너는 빙긋 웃어보였다.
- 날 말릴 때는 꿈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진 못했잖아.
-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잖아. 난 네가 죽었다는 걸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그냥 네가 어딘가에서 그렇게 자유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 넌 그냥 내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허상일 뿐이고.
- 나만 그런 거 같아?
- 뭐?
너는 발걸음을 옮겨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물어보는 거야. 나만 그런 거 같냐고. 넌 어차피 네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로 받아들이잖아. 그럼 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어.
- 소설 쓰고 있네… 그럼 나더러 이게 꿈인지 저게 꿈인지 선택해 보라는 거야 지금?
- 그건 아냐. 그런 얘기를 할 사람은 따로 있지. 난 그냥… 문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야.
- 문?
-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죽지 않았어. 내가 문의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 있었지? 모든 세상들의 중심에 위치한 곳. 세상과 세상 사이를 헤엄치다가 지친 이들이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 난 그곳에 도착했어. 그리고 네가 있는 세상을 열어서 이렇게 널 초대한 거고.
너는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반투명한 천조각 틈새로 너의 몸이 조금씩 비춰보였다.
- 그렇게 맘대로 문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냥 내가 깨어있을 때 찾아오면 간단하잖아. 왜 이렇게 미심쩍은 방법을 쓰는 건데?
- 세상과 세상 사이에는 간단히 극복할 수 없는 차이들이 있어. 어쨌거나 네가 깨어있을 때에도 나는 너를 찾아갈 거야. 네가 그걸 쉽게 느낄 수는 없겠지만. 네가 보다 의식적으로 자유로운 꿈속에서 나를 분명히 느낄 수 있을 뿐이야. 이해하겠니?
- 아니.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내가 너한테 얘기했지. 걱정 말고 기다리면 세상의 문이 열리는 광경을 보여주겠다고… 어쨌거나 네 선택만이 남은 거야. 나는 여기 있으니까, 네가 오면 돼.
- 어디로 가면 된다는 건데?
- 여기. 네가 잠든 곳.
거기까지였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 따위에 매료되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너의 빈소에 있었다. 너의 빈소는 외로웠다.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만큼이나 오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너에게 친척이라곤 동생 한 명 뿐이고, 친구들도 대부분 오래 전에 소식이 끊겼으니까. 상복을 입은 채 지쳐 쓰러져 있는 동생 앞에 선 너의 직장 동료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절을 하고 너의 동생을 일으켜 판에 박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는 울고 또 울다 너절해진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너의 동생의 귀에 들릴 만한 말을 아무 것도 골라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오갈만한 사람들이 모두 오가고 난 뒤, 곤히 잠든 너의 동생을 어떤 소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몇 걸음 밖에서 측은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새벽은 처참하게 찾아왔다. 나는 무력한 파수꾼처럼 새벽을 채우는 강고한 소리들을 허탈하게 듣고 있었고 너의 동생은 자주 뒤척였다. 나는 꿈에 나온 너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정말 네가 다른 세상에 도달했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너의 동생을 찾아갔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우리를 이렇게 버려 둔 채로 다른 세상을 향해 가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선가 거대한 냉장고 소음이 들려왔다. 주변에 냉장고 같은 것은 없었지만, 새벽의 기계소음은 본래 주인 없이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법이다. 너의 동생이 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냈다.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너의 동생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만히 감싸주었다. 네 동생은 고개를 돌려 부스스한 눈으로 날 올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 동생이 이상한 말을 꺼냈다.
“누나를 봤어요.”
나는 침을 삼켰다.
“바다 속에 있대요… 비행기 안에 밀폐된 공간이 있는데, 폭발에 휩쓸려서 들어가게 됐대요. 절 기다리고 있어요. 오래 기다릴 순 없는데, 숨이 너무 막힌다고… 그리고 너무 겁난다고… 구해달라고…”
나는 네 동생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네 동생은 숨을 헐떡여가며 인도양 한가운데에 떨어진 비행기 잔해 속에 갇혀버린 너의 목격담을 늘어놓았다. 꿈이 어찌나 생생했던지 네 동생은 울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대양을 향해 떠나버릴 것 같이 꿈틀거리는 어깨와 발목을 붙잡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설명이 필요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곧 모든 환상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네 동생을 끌어안은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웅웅대는 소음이 유독 거대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날 밤 또 꿈을 꾸었다. 잠수복을 입은 채 인도양으로 들어온 나는 물 속에 가라앉은 비행기 잔해를 보고 있었다. 푸른 물 깊숙이 창살처럼 스며들어온 햇살이 날카롭게 잔해에 가닿았다. 종잇장처럼 찢어진 잔해 어느 구석에도 밀폐될 공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는데, 너는 모래톱에 처박힌 잔해 앞에서 수면안대를 낀 채로 자유로이 유영하며 잔해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마치 신기하다는 듯이.
그런데 어느 순간, 네가 뒤돌아섰다.
- 나 안 죽었어.
나는 멍한 표정으로 널 바라봤다.
- 문이 열렸어. 비행기가 떨어지는 순간에 문이 열려서… 살아났다고. 내 얘기 잘 들어. 아마 오늘부터 네가 잠들 때마다 누군가 찾아갈 거야. 전부 다 나처럼 보이겠지. 누군가는 내가 살았다고 할 테고, 누군가는 죽었다고 말할 텐데,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잘 선택해야 돼. 날 위해서가 아냐. 이건 일종의 시험이야. 네가 어느 세상을 살리고 어느 세상을 죽이는지를 선택하게끔 되어 있는 거라고. 내 말 들리니? 이해하는거야? 너한테 얘기할 방법이 이거밖에 없어. 안 들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귓가에 요란한 기계 소음이 들려오고 눈앞에는 네 동생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검은 실루엣이 유독 스산하게 보였다. 네 동생은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하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형도 누나 만났죠?”
나는 숨을 죽였다.
Ⅲ.
너는 그 날부터 매일 밤, 나를 찾아왔다. 매일같이 다른 모습이었다. 일상과 환상의 모든 순간이 꿈속의 공간으로 모습을 바꿔서 너를 간직한 채로 나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너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울부짖기도 하고, 비행기를 폭파한 범인을 알고 있으니 잡아달라고 말하기도 하며, 이젠 죽었으니 깨끗이 잊으라고 말하기도 하고, 문들이 가득한 세상의 중심으로 갔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수십 명의 네가 모두들 현실의 궤도를 붙잡거나 허무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역설하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처음 네가 죽는 꿈을 꿨을 때 느낀 생경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정말 이 모든 것들이 내 무의식이 만들어 낸 내 꿈이 맞는다면, 그 어딘가에 이 혼란함을 풀어낼 단서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꿈들은 내 의식 밖에서 날아와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나는 새벽녘마다 알 수 없는 기계소음에 깨어나 식은땀을 흘리며 허덕였다.
나와 비슷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네 동생이었다. 네 동생도 밤마다 너를 본다고 했다. 다만 네 동생에게 찾아가는 네 모습은 하나의 분명한 목적과 형태를 띠고 있었다. 너는 네 동생을 어디론가로 불러냈다. 그것은 동네 골목길이 되기도 하고, 공항 출국장이 되기도 하며, 처음처럼 바다 속 어딘가가 되기도 했지만, 가장 잦은 것은 아프리카였다. 네가 죽은 뒤 내가 처음으로 봤던 네 모습, 아마도 그것인 모양이었다. 너는 네 동생에게 어서 나를 따라 아프리카로 오라고 말했다. 네 동생은 현실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이따금씩 나를 찾아와 애처로운 목소리로 하소연하곤 했다. 뭔가 이상해요. 정말 누나가 가려고 했던 곳에 가면 뭔가 있는 게 아닐까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라던가,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이라던가… 나는 그럴 때마다 단호한 목소리로 누나는 죽었어, 라고 이야기해 줘야 했으니, 피붙이에게 수십 번씩 사망소식을 전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 너는 정말로 잔인했던 셈이다.
나는 자주 어디론가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고 길거리에 주저앉곤 했다. 그럴 때면 귓가엔 알 수 없는 기계소음 - 한밤중의 냉장고 소음 같은 것 - 이 들리고 땅과 하늘에 예리하게 금이 가서 깨져버릴 듯 흔들렸다. 꿈은 점점 더 강렬해져서 이젠 대낮에도 너희 환영을 보곤 했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네 동생은 점점 더 자주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니, 이젠 나를 찾아와서 대놓고 너의 흔적을 찾아갈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죽었다고 이야기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 네 동생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누나가 방에 찾아왔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네 동생이 걱정돼서 걸음을 서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네가 걱정되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죽거나, 죽지 않았거나, 혹은 문들이 가득한 세상의 중심으로 가 있을 테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사실일 수도 있을 텐데, 내가 받아들이고 선택해야 할 현실의 층위는 그 어느 곳에도 놓여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중요한 속임수가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었다.
네 동생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문짝 중 일부분이 조각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부서지거나 칠이 벗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냥 문의 한 부분이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 ‘깨져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떨어져나간 조각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부비고 손을 떨다 보니 귓가에는 기계소음과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네가 있었다.
너의 손에는 예리한 커터칼 하나가 들려 있었다. 네 동생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경건하게 너의 눈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동생을 ‘조각내는’ 중이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커터칼이 사뿐하게 몸을 오가자 네 동생의 부분 부분은 마치 퍼즐조각처럼 툭툭 떨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나는 내가 미쳐버렸다는 직감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귓가에 기계소음이 요란해지며 와그작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강가에 낀 살얼음이 맹렬히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이게 다 뭐야?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칼질을 멈추지 않던 너는 문득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보여줄게. 세상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야.”
수천 개의 유리창이 동시에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꿈인 것 같았다. 눈을 뜨거나 정신을 차린 적도 없는데 갑자기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방에는 처음 보는 사람 두 명이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서 있었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들은 이윽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말을 걸었다.
- 정신이 들어요?”
- 여기가… 어디죠?”
나는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더니 날 끌어안았다. 몸에 전해지는 감촉이 너무나 생생해서 차마 꿈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웅웅대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고 있는 알 수 없는 기계 하나,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시력검사용 판넬 하나,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유리와 그 너머에 다시 알 수 없는 물건들로 가득한 방들. 눈에 익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 대성공이에요! 이봐, 시간 기록 철저하게 해 두고. 자기가 누군지는 알겠어요?”
- 제가 누군지는 아는데 여기가 어딘지는…”
- ‘선택’ 한 건가요? 능동적으로? 혹은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서?”
- 선택한 적은 없고 그냥 갑자기 세상이 조각나서 정신을 잃고 보니…”
- 조각났다구요? 누가 조각냈죠?”
네가. 네가 그랬지. 커터칼을 든 채 세상을 난도질하던 너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눈에 선해서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 설명을 듣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별안간 내 팔짱을 양쪽에서 끼고 의자에 앉히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잘 들어요. 여기는 관문의 도시에요. 세상의 중심이죠. 그리고 당신은 어제까지 우리와 함께 일하던 연구원이구요. 우리는 의도적으로 관문의 도시를 떠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선택하고 주인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과연 관문 간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능동적으로 창조하고 선택할 수 있는가? 에 관한 연구죠. 당신이 지금 인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당신이 아니에요. 그 여자, 그리고 그 동생, 혹은 ‘아프리카’ 라던가 쉴 새 없이 웅웅거리는 기계소음 같은 것들… 다 기억하죠? 전부 만일을 대비해 당신을 강제로 깨어나게 하기 위한 비상장치들이었어요. 세상이 조각났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니까 뭔가 제대로 진행되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제 말 이해하겠어요?”
- 아…니오.”
- 역시 강제각성이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완전히 코마상태에 빠지기 전에 돌아오기는 했으니까. 관문간 여행은 역시나 아직도 어려운 모양이네요… 저 정말 모르겠어요?”
- 이거 다 꿈이잖아요?
그들의 표정이 굳었다.
- 이게 현실이에요.
- 아뇨… 그럼 애초에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말 일도 없이 아예 모든 게 존재하질 않았단 건가요?
- 그건 전부 관문 너머의 일이죠. 당신은 이곳에 살고 있었어요. 물론 관문간 여행과 그에 뒤따르는 모든 부작용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작성하긴 했지만, 우리가 도와줄게요. 예전 기억을 되찾을 수 있어요.
- 그럴 리가 없는데.
- 그게 맞아요.
- 그럼 어디로 간 거죠? 죽거나 산 게 아니면 문들의 세상에 갔다고 했어요. 그럼 여기 어디엔가 있을 거예요.
- 가짜에요. 당신이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이던가. 아직 문 너머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이 최초로 그걸 시도했다가 지금 이렇게 됐잖아요.
- 도대체 관문이 뭐죠?
- 세상과 세상을 잇는 길이에요.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지금은…
- 돌아갈 수 있나요?
- 어디로? 강제각성이 이루어져서 당신이 관문을 넘어가서 만들어낸 세상은 이미 붕괴됐어요.
- 그럼 다른 세상들은?
나는 눈을 감았다. 기계가 웅웅대는 소리가 커지며 세상이 지르는 비명이 귓가에 들려왔다. 당황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관문생성기 닫아! 지금 차원추방자가 발생하게 생겼…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Ⅳ.
꿈들이 너무 많다. 사소하고 초라한 꿈부터 진지하고 거창한 꿈에 이르기까지 나는 쉴 새 없이 꿈을 꾼다. 천 가지가 넘는 꿈속을 넘어 다녀도 어디에나 네가 살아있다. 이 모든 꿈들이 각자 다른 세상의 투영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모든 무의식의 무절제한 발현이 이런 식으로 표현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죽었거나, 살아있거나, 문들의 세상에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내가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관문의 도시니 관문간 여행이니 하는 말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내 허약한 무의식이 만들어낸 일종의 도피기제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내가 꿈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건들 가운데 어느 하나 정도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나에게 확신시켜 주는 사람이 없다. 모든 세상은 내가 거부하는 순간 거품처럼 무너지고, 퍼즐처럼 조각나고, 기계소리를 내며 붕괴하고 만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 네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거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세상 모든 일들이 거짓이더라도, 너의 존재만은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너의 존재는 나의 망설임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
문득 저 창문 너머에 보이는 사람에 대한 너의 의문이 떠오른다. 그는 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혹은 그는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는 무언가 내가 하지 못한 결정과 선택을 내리고 있는 걸까. 네가 어디엔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면, 나는 네가 언젠가 나와 같은 꿈을 꾸는 결정을 내리길 수 있길 바란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 관문의 도시는 SIGIL 을 연상한 겁니다.
* 근데 왜 필력은 점점 감퇴만 해 가는건지... 절망적입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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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타소스코드 보고 한탄했던 게 이 작품이로구나.ㅋ 모르는 방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는 내 기억 속 네 작품 중 단연 최고! 흥미진진하게 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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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군2011/05/15 01:25 [Edit/Del]막판은 언제나 그렇듯 끈기부족/졸음폭발의 여파가...
그나저나 이게 최고라니! 전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엉망이었던 걸까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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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Hotel CaliforniaHotel California
Posted at 2010/04/01 21:25 | Posted in 잡글들/소설사막은 넓고 더웠다. 남자는 눈앞에 안개처럼 뿌옇게 번진 모래바람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오른손으로 눈썹 위에 고인 땀방울을 훔쳐냈다. 오래도록 기어 스틱을 붙들고 있던 오른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끈적한 느낌이 한결 가셔도 작은 먼지들이 두드러기처럼 들러붙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지독한 열기는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아내는 사막횡단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는 반드시 자동차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괜한 노파심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총연장 만 오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사막횡단 고속도로에는 상, 하행선을 통틀어 휴게소가 네 개 뿐이고, 잠시 몸을 쉴 수 있는 곳이라고 해 봐야 세 시간에 한 번 꼴로 나타나는 무인 주유소가 고작이었으니까. 그나마도 낡은 냉커피 자판기와 파라솔 두세 개뿐인 휴게시설에 절망할 때쯤이면, 사막 먼 곳에서 발작처럼 모래폭풍이 일어나곤 한다. 허둥지둥 차 안으로 몸을 숨겨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쉰 목소리로 지껄이는 라디오를 들으며 한껏 시간낭비를 한 뒤에야 모래바람 때문에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사전점검을 아무리 충실히 한다 하더라도 이 고속도로를 타고 사막을 무사히 횡단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자동차 상태를 점검하라는 조언은 사막여행자의 금과옥조로 삼기엔 지나치게 원론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가 굳이 아내의 충고를 떠올린 이유는, 그저 그것이 누군가의 유언으로 삼기엔 지나치게 건조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꼬박 팔 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람막이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보며 짤막하게 물었다. 또 어디 가? 남자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양말을 벗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틀 후에. 사막을 건너야 될 것 같아. 출판기념회가 있어서. 아내는 오래도록 대답이 없었다. 속옷만 입은 남자가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할 때,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차 끌고 갈 거면, 종합점검 받고 가. 남자는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때 까지도 아내가 단순히 잠들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팔 개월 만에 집을 찾은 남편을 고작 낮잠으로 반기는 아내의 태도에 적극적으로 분개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냉장고에서 찾아낸 캔 맥주를 홀짝거리며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을 뿐이다.
해가 지자 남자는 잠들었고, 밤늦게 깨어난 후에야 아내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챘다.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둔 아내의 얼굴은 거의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질려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새벽이 깊어갔다. 형광등이 껌뻑이는 침실에서 남자는 덩그러니, 바싹 마른 아내의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남자가 울기 시작한 건 숨을 거둔 아내의 품에서 오래된 미라처럼 말라버린 갓난아기를 발견했을 때였다. 아내의 가슴팍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은 아이는 꼭 아내와 한 몸 같아 보였다.
아이를 아내에게서 떼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갈퀴 모양으로 뻗은 채 말라버린 아이의 손을 꼭 말아주고, 껌뻑이는 불빛에 멍하니 고정된 아내의 눈을 감겨준 뒤, 남자는 침대 곁에 무릎 꿇은 채로 아내의 손을 꼭 쥐고 미친 사람처럼 오열했다. 이윽고 해가 다시 떠오르고 갈래진 햇살이 커튼 너머로 깊이 스며들 때 까지도 남자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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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는 하루 뒤에 치러졌다. 조문객은 한 사람이었다. 불이 꺼진 빈소로 찾아온 의사는 침대 아래에 쓰러져 기절한 듯 잠이 든 남자를 깨워 블랙커피와 아스피린을 건넸다. 의사는 두 달 전 미숙아를 출산한 뒤 기진한 아내를 틈이 날 때마다 살펴 왔다고 말했다. 의사는 아내를 외로운 죽음으로 내 몬 남자의 무책임함을 탓하지 않았고, 남자는 아내를 영양실조로 방치한 의사의 나태함을 추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내가 살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만 힘없이 중얼거리며 거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말은 주로 의사가 먼저 꺼냈다. 바쁘셨나봐요. 예. 집필 중이라서. 혼자 있고 싶었어요. 그러셨군요. 아내 분께서 남편 얘기를 좀처럼 안 하셔서… 미혼모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았겠죠. 자기 얘기를 잘 안하는 사람이에요. 남부끄러운 얘기는 더더욱… 남자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커피를 홀짝이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의사의 얼굴, 혹은 허공이나 불길하게 껌뻑이는 침실의 형광등 같은 것을 바라보며, 말라버린 눈물 때문에 따끔거리는 볼을 긁적였다. 커피를 다 마시자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 일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의사는 황당하다는 듯 대답했다. 남편분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장례는 치러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자는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전…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몸을 일으킨 그는 의사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외투와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까지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그대로 사막횡단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그 이후로, 남자는 밤을 새워 꼬박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이미 모래폭풍이 예보된 고속도로에는 아무런 인적이 없었다. 엔진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오른 발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하늘부터 땅 끝까지 같은 색으로 칠해진 뿌연 공간은 너그럽게 입을 벌려 남자의 자동차를 삼켜버리고, 그 끝이나 시작이 도대체 어디인지 보여줄 기색도 흘리지 않았다. 그동안 차 안의 공기는 그 아득한 공간 전부를 부지런히 집어삼키고는 폭발할 듯한 열기로 한껏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사막은 넓고 더운 곳이었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만 오천 킬로미터를 완주해서 아주 먼 곳에 발을 디뎌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척추를 타고 올라와 이마를 달구는 지독한 열기만은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에어컨을 고쳐줄 카센터나, 차가운 얼음물과 쾌적한 샤워시설을 제공할 호텔이 필요했다.
문득, 뿌연 먼지 속으로 붉은 색 입간판이 신기루처럼 스쳐 지나갔다.
- 호텔 캘리포니아, 4Km
모래바람은 호텔 정면의 주차장으로 들어설 때쯤 잠잠해졌다. 거짓말처럼 파랗게 갠 하늘을 등지고 서있는 5층짜리 갈색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 외벽의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빛이 바랜 것으로 봐서는 제법 오래된 건물인 것 같았다. 남자는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막횡단 고속도로에 이렇게 그럴싸한 호텔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남자는 지도를 펼쳐 봤지만, 사막과 고속도로밖엔 없는 이 근방에는 이정표로 삼을만한 지형도, 건물도 없었다. 등고선이나 참조점 하나 찍혀 있지 않은 오만분지 일 지도는 그저 백지 위에 일직선 도로 하나만 그려 놓은 헝겊조각에 불과했다. 남자는 지도를 접어놓고 모래바람과 땀에 범벅이 되어 퍽퍽하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호텔 현관으로 걸어갔다.
흙먼지가 곤충 떼처럼 들러붙은 호텔 현관문 앞에 나무 입간판이 서 있었다. '캘리포니아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1945' 남자는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쓰여진 환영 문구를 한동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1945년이면 이 고속도로가 닦이기도 전인데.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입간판의 상태나 말라붙은 페인트칠이 뜯어지고 있는 글씨의 질감으로 보건데 정말 1945년에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밀었다. 문 틈새에 들러붙은 흙먼지들이 녹슨 경첩이 지르는 비명소리와 함께 눈앞에 쏟아졌다. 남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법 넓은 호텔 로비에는 맑은 사막의 오후가 아늑한 태양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역시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제법 된 것처럼 보이는 호텔 내벽은 오래된 폐허와 조금 낡은 건물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 건지 깊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기분 나쁜 침묵이 제법 넓은 공간에 가득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남자는 현관에 우두커니 선 채로 자신이 혹시나 사막의 모래폭풍에 파묻힌 고대의 호텔 유적 같은 걸 발견한 건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그 경우에 가장 곤란해지는 건 역시 얼음물이나 샤워시설 같은 것은 기대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서려는 순간, 문득 기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남자는 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고색창연한 목재 카운터를 발견했는데, 그 너머에는 사람의 것처럼 보이는 회색 머리칼이 일정한 박자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짐작은 정확했다.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낡은 턱시도를 입은 채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는 카운터에 노트 두 개와 오래된 금고를 올려두고는 퍽이나 편안한 자세로 졸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옷을 입은 채 이런 카운터에 앉아 있는 노인은 어쩐지 종업원이라고 부르기는 뭣하고, 지배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카운터 안쪽으로 몸을 뻗으며 지배인을 깨웠다.
“저… 방 있나요?”
지배인은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름진 눈만 떠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이 있다거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별 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역시 영업은 하지 않는 건가. 남자는 머쓱해진 얼굴로 지배인의 시선을 피했다.
"뭐… 여기 지금은 영업 안하는 모양이죠? 오는 길에 차가 고장 나서 그러는데, 근방에 카센터 같은 건 없나요?"
지배인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럼 보험회사 사람이라도 불러야 될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제가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까 주변에 뭐가 있는지 확인을 못해서…”
“우리 호텔은 지도엔 없습니다.”
쇳소리가 반 쯤 섞인 그 대답으로 짐작해 보건데, 지배인은 못 말리는 애연가가 아니면 퍽이나 오랫동안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예. 저는 제가 못 찾은 건 줄 알았는데, 여기 지어진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죠? 아니면 짓고 있는 중인 건가요?”
“아뇨. 너무 오래돼서 그렇습니다.”
지배인은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켜 카운터 밖으로 나오더니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지배인을 쫓아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 호텔, 언제 지은 건데요? 지배인은 느릿한 걸음으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으며, 걷는 속도만큼이나 느지막하게 대답했다. 1945년입니다. 남자는 현관에 서 있던 낡은 입간판을 떠올렸다. 45년이면 사막횡단 고속도로가 뚫리기도 전인데요? 예. 지도 갱신작업도 고속도로 공사와 함께 진행했거든요. 이곳 부근을 조사할 때 마침 모래폭풍이 거세게 불어서 우리 호텔을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 그럼 지금 이 호텔 위치는 관공서에서도 모르고 있다는 건가요? 예. 어차피 수도나 전기 같은 건 우리 쪽에서 직접 공급하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런 걸 어떻게… 호텔 뒤뜰에 오아시스도 있고, 발전시설도 있습니다. 적은 양이긴 하지만 석유가 나는 곳도 가까워서 유용하게 쓰고 있지요. 그럼 전화는요? 전화할 일이 많진 않지만… 위성전화가 몇 대 있습니다. 인터넷도 위성으로 쓰시면 돼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도에도 없고, 관공서도 알지 못하는, 심지어 어떤 여행자도 언급한 적이 없는 호텔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1, 2년도 아니고 60년이 넘는 시간동안 완전히 고립된 채로 ‘영업’ 이란 걸 해 왔다고? 남자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려는 순간, 지배인은 어떤 방 앞에 멈춰 서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문틈에 끼어 있던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서 눈앞을 가렸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묵으시면 됩니다.”
방 한가운데로 들어간 지배인은 남자를 돌아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싱글침대 하나가 들어가고도 다섯 사람쯤은 더 누울 만한 크기의 방 한 편에는 유리로 된 칸막이와 욕조가 있었고, 맑은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는 창문과, 목제 책상, 작은 TV,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냉장고도 있었다. 지배인은 창문을 열더니 TV를 켜고 냉장고도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냉장고 안에는 가지런히 줄을 맞춘 캔 맥주 다섯 개와 생수 한 통,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얼음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눈에 띄게 낡아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자면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방 좋네요.”
지배인은 남자의 말을 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방 밖으로 걸어 나가며 남자에게 열쇠를 건네더니, 정중한 태도로 문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짐 정리 다 끝나시거든 카운터로 내려오셔서 체크인 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중얼거렸다. 일처리는 신속한 사람이구나.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 하룻밤에 얼마나 하죠?”
지배인은 고개를 저었다.
“방은 많으니까 얼마든지 묵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네?"
“저희 호텔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편안한 휴식 되십시오.”
지배인은 그냥 허리를 살짝 숙인 것처럼 보였는데, 방문은 자동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르륵 소리를 내며 얌전히 닫혀 버렸다. 남자는 황당한 기분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손님 없으니까, 그냥 공짜로 묵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그게 이 호텔 지배인이 생각하기엔 이치에 맞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치에 맞는다고 해도 어쨌든 꺼림칙한 일인 것은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그냥 가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며 남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양이 지평선에 제법 가깝게 내려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열려 있는 냉장고 안에 있는 캔맥주와 얼음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사막은 매우 넓고 더운 곳이라는 점을 되새겼다.
주차장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마칠 때까지, 남자는 호텔 근처는 물론 안에서도 그 누구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사막의 해는 빠른 속도로 저물었다.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남자가 자기 말고 다른 손님은 없는 거냐고 물었지만, 지배인은 주름진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며 대답할 뿐이었다. 네. 빈 방은 많으니까 얼마든지 묵으셔도 괜찮습니다. 남자는 계단을 다시 올라와 짐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질문을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손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은 없느냐고 물어봤어야 하는 것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에게 지배인은 인터폰을 걸어왔다. 저녁은 1층에 있는 식당에서 해도 되고 룸서비스를 불러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음식은 도대체 누가 만드는 것이며, 식재료는 어디서 구해 오느냐고 묻자 지배인은 미묘한 비웃음을 머금은 말투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실 것 없지 않습니까? 지배인은 룸서비스는 물론 식당에서 먹는 저녁에도 추가 요금은 없다고 말했다. 방에 있는 맥주를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1층 로비에 설치된 위성전화나 위성인터넷을 사용하는 것도 무료라는 설명까지 듣고 나자, 남자는 오히려 냉장고에 있는 얼음 하나도 건드릴 자신이 없어졌다. 남자는 침대에 멍하니 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이건 뜻밖의 행운이라기보다는 퍽이나 기분 나쁜 옛날이야기에 가까웠다. 지도에도 없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의 외딴 호텔에 묵게 된 남자. 자신 이외의 손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호텔 안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라곤 기분 나쁘게 늙은 호텔 지배인과 자기 자신뿐이다. 어느덧 밤이 깊어가고 TV에 잡히는 거라곤 철지난 영화만 줄기차게 틀어대는 위성 채널 뿐. 이런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낄 때쯤이면 꼭…
문득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일으켰지만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뒤늦게 소리쳤다.
“누, 누구세요!”
반응은 뜻밖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남자를 발견하더니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가 반쯤 열린 문에 걸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축축한 것이 질퍽하게 바닥에 떨어지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당해진 남자가 문 뒤의 상황을 살펴봐야 하는 건가 생각할 무렵, 침입자는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젊은 여자였다. 긴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흥건히 젖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어쨌든 또 다른 사람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지만, 여자의 당황한 표정 때문에 불길한 기분은 영 가시질 않았다. 남자는 어색하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손님이세요?”
여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뭐, 일단 이 방을 쓰기로 했는데요.”
“내가 못살아, 진짜… 언제 오셨어요?”
“몇 시간 안 됐는데요. 그보다 누구신지…”
“뭐 먹거나 마신 건 없죠?”
“아… 네.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냥 자려고…”
“다행이네요. 빨리 가세요.”
“네?”
여자는 잠시 문 뒤로 사라졌다가 대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차리고 있는 모습이나 가져온 물건으로 짐작하건데 또 다른 손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양동이를 방 한가운데에 내려놓더니, 대걸레를 지팡이처럼 짚어 몸을 기댄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늘밤은 늦었으니까 일단 주무시고 가셔야겠네요. 단, 내일 아침 호텔을 떠나기 전까지 여기서는 어떤 음식이나 술도 입에 대선 안돼요. 여기 냉장고에 있는 맥주나 물도 마찬가지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머리가 지끈거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여자를 노려보다가 질문했다.
“도대체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저요? 보면 몰라요? 저 여기서 일해요. 청소하러 온 거구요.”
“언제부터요?”
“그거야… 아실 거 없어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빨리 떠날 생각이나 하세요. 사막을 건너셨으면 꽤 피곤하실 테니까 어서 주무시는 게 좋겠네요. 빨리 주무셔야 빨리 일어나겠죠? 빨리 일어나야 빨리 떠날 수 있으실 테고?”
“여길 빨리 떠나든, 안 떠나든, 그건 제 사정이겠죠. 지배인 말로는 뭘 먹고 얼마나 지내든 공짜라던데요?”
여자는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남자에게 물었다.
“아저씬 가족도 없어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남자의 머릿속에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싹 메말라 뼈대만 앙상했던 손목과, 투명하게 질린 채 모래바람에 씻겨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던 입술, 보기 흉하게 찌그러진 가슴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있던 아이의 모습까지. 남자는 사막 저편에 던지고 온 불쾌한 기억들이 어째서 자신의 것이어만 하는지, 앞으로 몇 천 킬로미터를 더 달려야 ‘나는 이제 가족도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아직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대답이 목구멍까지 힘겹게 기어 올라와서 울대를 간지럽혔다. 아뇨. 가족이야 있죠. 얼마 전에 다 죽어버린 게 흠이지만.
여자는 목을 쭉 빼서 남자의 표정을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요.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뭔가 사정이 있었겠죠. 일단은 혼자 있게 해 드릴게요. 고민 끝나시거든 얼른 짐부터 챙기시고 주무세요.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되도록 빨리 떠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 그리고…”
양동이를 들고 문을 나선 여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뒤쪽까지, 찰랑이는 양동이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발자국처럼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꼭 어떤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는 호텔을 벗어나는 길, 멀게는 아내의 환영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는 길. 어느 쪽이던 간에, 지금의 남자에게는 무언가를 따라가는 게 중요했다. 끝없는 공간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어 있는 고속도로라던가, 인기척도 없고 손님도 없는 호텔에서 처음 만난 종업원이 흘린 흔적이라던가. 하지만 그녀는 따라오라는 말 대신 떠나가라고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남자의 마음을 긁어댔다. 그러니까, 피하고 도망가고 떠나가야 할 것은 하나로 족했다. 아내에게서 도망치는 것만으로 남자는 충분히 머리가 아팠다. 여자는 아직 문 뒤에 있었다. 남자는 그저 그녀가 뭔가를 알려주고 자신이 따라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길 바랐다.
여자는 문 뒤에 몸을 숨긴 채 말했다.
“오늘 밤엔 무슨 일이 있어도 방 바깥으로 나와선 안돼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은 조심스럽게 닫혔다. 철퍽거리고, 찰랑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어둠이 내린 방 안에 스산한 냉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원래 사막의 밤이란 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법이다. 남자는 짐을 뒤져 노트북과 긴 옷들을 꺼냈다. 침대 맡의 스탠드를 켠 채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뒤적이던 남자는, 그제야 오늘밤에 자신의 첫 출판기념회가 계획되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집을 나와 사막을 건너 자리를 잡은 도시에서 팔 개월 만에 써 낸 작품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출판사 담당자는 일주일 뒤에 있을 출판기념회에는 아내도 꼭 데려오라고 이야기했다. 웃으면서 꼭 그러겠노라고 대답한 남자가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내기까지는 사흘이 더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를 때 까지도 남자는 집에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 어쩌면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아타면서도 정작 집에 들어설 계획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남자가 집을 떠나던 날, 아내는 공항까지 따라와 울면서 화를 냈다. 슬픔과 분노의 극단을 오가며 남편을 붙잡던 그녀가 정작 뱃속의 아이에 대해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던 건, 단순히 자신 때문에 일생의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남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아내가 혼자서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죽어가기까지 얼마나 숱한 감정들을 견뎌내야 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내가 숨을 거둔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것은, 삶에 정직하게 맡서 본 적이 없는 이야기꾼일 뿐인 남자가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호텔은 고요했다. 남자에게는 많은 생각으로 채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지만 정작 쓸 만한 생각이라곤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팔개월간 팽팽하게 당겨진 채 한결같은 긴장을 유지하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어이없이 끊어져 버린 게 도대체 뭔지, 살펴보려던 남자는 무수한 자살충동만을 확인하고 좌절했다. 시간이 흘렀다. 창문을 타고 달빛이 습하게 스며들었다. 남자는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잠을 깬 남자는 창밖이 불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잠이 덜 깬 눈을 깜빡였다. 아코디언 소리, 기타 소리, 유리잔 깨지는 소리나 나무 같은 것이 삐그덕 대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제일 많이 들리는 것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족히 수십 명은 넘는 사람들이 창밖에서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밖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사막 가까운 곳까지 알 수 없는 불빛이 일렁거렸고, 그 불빛 가까운 곳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갈래진 채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분간해 내긴 힘들었다. 아무런 체계 없이 마구 뒤섞인 그들의 목소리는 그러니까, 큰 술집을 꽉 채운 사람들의 소음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창에 가까이 다가선 남자는 그 추측에 가장 걸맞은 장면을 확인하고 입을 딱 벌렸다.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호텔 뒤편의 작은 오아시스를 무대로, 여덟 개의 탁자로 꾸며진 파티장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악기를 들고 탁자에 걸터앉은 채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아예 한 탁자에 둥글게 모여서 거국적인 건배를 나누는 사람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 악사들 앞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 쓰러져 버린 사람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까지 인파의 면면은 다양했고 연령이나 성별대도 그만큼 폭이 컸다. 게다가 그네들의 차림새를 살피고 보니,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가 만들고 입어온 거의 모든 의상들이 한 자리에 모인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것은 튜닉Tunic을 입은 여자와 카우보이 옷을 입은 남자가 술잔을 나누고 있는 이 파티장에는 할로윈 파티에나 느껴질 위화감 같은 것이 조금도 없다는 점이었다. 다양한 옷의 주인들은 모두, 정말로 그 옷을 입고 생활했을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 기묘한 조화보다는 역시 조금 다른 점이 놀라웠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남자는 당장 인터폰을 들어 지배인을 부르려고 했지만, 파티장에서 손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든 채로 인파 사이를 미끄러지듯 돌아다니는 지배인을 발견하고 말았다. 좀 더 살펴보니 지배인을 포함해서 적어도 열 명은 되는 종업원들이 분주히 음식과 술을 나르고 있었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종업원들의 자취를 쫓았지만, 그들 가운데 저녁 무렵 방을 찾아왔던 젊은 여자는 없었다. 남자는 창틀에 손을 짚은 채 그녀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이런 밤과 이런 공기에 어울리는, 뻔한 터부. 사막을 건너려거든 자동차 점검을 받으라는 아내의 충고가 머릿속을 어지러이 오갔다.
오랜 고민 끝에 남자는 창밖의 상황엔 신경을 끄기로 결심했다. 아침이 밝거든 여자의 충고대로 호텔을 빠져나가 다시 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나를 건너면, 다른 하나는 건너지 못하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인 법이니까.
창에서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를 보지 못했다면 남자는 계획대로 다음날 아침 호텔을 무사히 빠져나갔을 것이다. 어쩌면 무사히 도주에 성공해서 새로운 삶의 첫 발을 좀 더 일찍 디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짧은 순간, 남자의 눈엔 음악과 잡담과 폭소와 술기운으로 흥건한 파티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깡마른 얼굴, 가슴에 안긴 갓난아기. 제자리를 잘못 찾아온 사람처럼 흥겨운 파티장 한편을 슬픈 얼굴로 서성이는 그녀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였다.
“여보?”
혼자 멍하게 중얼거린 그는 이윽고 창문을 열고 목이 터져라 아내를 불렀다. 여보! 아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내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무수한 잡음들 사이에 섞여 파티장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아내의 흔적을 쫓다가, 뒤돌아서 온 힘을 다해 방을 뛰어나갔다. 백열등만 드문드문 켜져 있는 복도에는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계단을 거쳐 로비로 달려 나가는 내내 파티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남자의 귓가를 자극했다. 샹들리에가 침침하게 빛나고 있는 로비에서 뒤뜰로 통하는 문을 발견한 남자는 그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알았다. 남자가 문 앞에 다가서자, 대걸레자루를 짚은 그녀는 수문장처럼 손을 뻗어 문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제가 뭐라고 했죠?”
“저 사람들 다 누구야! 어디서 온 거야!”
“손님들이에요. 여기 죽 있었고요.”
여자는 빈정대듯 대답했다. 남자는 손을 뻗어 문 너머를 가리켰다.
“내 아내… 아내가 저기 있다고!”
“그래요. 그게 어때서요. 아내 분도 파티를 즐길 자격은 있잖아요?”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상한 소리 그만 두고, 비켜.”
“가서 뭘 하시려고 그러는데요?”
“만나야지!”
“만나면 어쩌실 건데요?”
“얘기를 들어야 할 거 아냐!”
텅 빈 로비에 남자의 고함소리가 메아리 쳤다. 자기가 내뱉은 말을 다시 들으며, 남자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슨 얘기를 듣겠다는 거지? 아내는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구절절이 늘어놓을 사람도 아니거니와, 남자 역시 그런 말을 일일이 듣는 걸 원하지도 않았다. 문득 정문으로 달려 나가는 게 현명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속도로를 탈 때부터 도망치는 게 애초의 목적이었으니까.
문 앞에 선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듣지 마세요. 들으면 안 돼요.”
“그게 무슨…”
“위층에서 저 사람들 노는 꼴은 못 보신 거예요? 다들 완전히 취했어요. 어느 술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죠. 저희 아버지는 술자리가 저쯤 되면 무슨 얘기건 주고받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고 그러시던데요. 집단적 독백상태에 빠졌다고 그러죠.”
“아기도 같이 있는데? 술을 마셨다는 거야?”
“글쎄요. 저희 호텔에선 술은 안 팔아요. 1969년부터니까 한 40년쯤 됐죠.”
이쯤 되면 할 말을 잃어야 정상인 것 같았다. 남자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 아내는 죽었다고. 아이랑 같이. 내가 직접 눈을 감겨줬는데. 왜 저기 있는 거야. 저 사람들은 전부 어디서 나온 거고…”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해 봐야 믿지도 않으시겠지만… 죽은 사람이 왜 나타났겠어요? 못 다한 게 있으니까 다시 오는 거죠. 저도 자세한 설명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여기 오는 사람들은 주로 못 다한 말이 많은 사람들 같더라고요. 파티 분위기만 조성해 주면 술이라곤 한모금도 없어도 저렇게 자기들끼리 모여서 논다니까요. 하지만 잘 들어 보면 다들 자기 얘기 늘어놓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죠. 내가 살아있을 때에는… 운운하면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오신 노인네들이 나 젊을 때는, 하면서 늘어놓는 말이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뭐, 자기들끼리 그러고 있어봐야 한이 풀릴 리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영원히 저러고 있는 거에요.”
“유령… 들이라는 거야? 저주라도 받은?”
“오해하지 마세요. 아무도 저주 같은 걸 내린 적은 없어요. 유령들이 자꾸 오면서 호텔 분위기가 이상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여긴 그냥 보통 호텔일 뿐이라고요. 어떻게든 내쫓아 보려고 40년째 술도 안 주는데, 참 끈질기기도 하죠. 아저씨 같은 사람도 불러들이고.”
“무슨 말이야?”
“아저씨 여긴 어떻게 왔어요? 우연히 왔다고 생각하죠? 천만에요. 여긴 누가 예약해주지 않으면 방 잡기 힘든 곳이에요. 아마도 아내 되시는 분이 예약하셨을 거예요. 내가 꼭 할 말이 있으니까 불러달라고… 유령으로서의 본능 같은 건가 봐요. 누구한테 말을 전해야 하는 건지 잘 알고 있는 거죠.”
남자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날 불렀다고? 못한 말이 있어서?”
“제가 아저씨를 말리고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들어주지 마세요. 아저씨 같은 사람, 많았어요. 무슨 얘긴지 꼭 들어야 하겠다면서 절 밀치고 뒤뜰로 달려 나갔죠. 뭐, 얘기를 다 마친 유령은 다음 날 부터는 파티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어요. 아저씨, 제 말 잘 들으세요.”
어둠 속에서 여자의 눈이 빛났다. 남자는 침을 삼켰다.
“말을 들어준 사람도 다음 날 아침부턴 보이질 않았어요.”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남자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우고 창밖부터 살펴보았다. 호텔 뒤뜰은 거짓말처럼 삭막했다. 남자는 잠이 들기 직전까지 쩌렁쩌렁하게 들려오던 소음들을 떠올리며 허탈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남자는 호텔을 떠나지 않았다. 침대에 웅크린 채로 TV만 멍하니 바라보며 반나절을 보내버렸다. 점심시간 무렵 다시 방문을 열고 나타난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남자에게 음식을 건네주었다. 여자는 딱딱하게 충고했다. 제가 주는 음식 외엔 물 한모금도 입에 대선 안돼요. 호텔 안에 있는 어떤 음식이든 입에 대는 순간 영원히 호텔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막연히 그 이유를 짐작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가장 흔히 하는 일이 무언가를 먹는 것이니까, 어쩌면 ‘유령의 본능’ 이란 그런 순간을 용케 잡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저녁에도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해가 지고, 다시 파티가 시작되었다. 남자는 슬픈 눈으로 창가에 서서 파티장 곳곳을 서성이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벌게진 채 자기 멋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틈새를 위태롭게 오가며, 아내는 이따금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려 이야기를 건넸다.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아내의 말을 듣더니, 이윽고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대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이었다. 어깨동무도 하고, 함께 춤도 추고, 악기도 연주하며 즐겁게 노는 것 같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파티는 먼 지평선에 여명이 감돌 때 쯤 중단되었다. 유령들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총총히 호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지배인은 종업원들과 함께 나와 식탁 여덟 개를 들고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뒤뜰은 다시금 삭막한 사막의 언저리쯤으로 변했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빨리 가세요. 그녀가 안내하는 길은 명확했지만, 남자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결국 호텔의 룰은 간단했다. 아내를 구원하던가, 자신을 구원하던가. 남자는 한없이 비참해지는 기분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돌아보았다. 침대에 누워 쓸쓸한 죽음을 맞던 아내의 모습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절망적이었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며칠 밤이 지나갔다. 여자는 끼니마다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남자는 매일 밤 아내를 내려다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내를 구하고, 내가 사라진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몰라요. 그런 건. 사라진 사람들은 지배인 몫이에요. 매일 방 청소도 해 주고, 룸서비스도 해 주죠. 그리고 식당에선 매일 수십인 분씩 밥을 짓는데, 저는 밥을 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 먹는 사람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한 적도 없어요.”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의 자신과 별다를 것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들은 창가에 서서 매일 밤 그 누군가의 모습을 바라볼 자유는 잃어버린 것이 확실했다. 할 말을 다 한 유령은 더 이상 파티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이대로 영원히 호텔에 남아 있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다만, 여자가 가져다주는 음식은 빵 몇 조각과 우유 같은 것이 고작이었고, 남자는 결국 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을 고스란히 이겨내야 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노트북을 굴리고 로비에 내려와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살피며, 남자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아내는 매일 밤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누군가에게 건넸고, 남자는 매일 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력한 나날들이 지나갔다.
어느 날 오후, 남자는 이메일을 받았다.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전화는 꺼져 있고, 집에 확인하니까 죽은 아내도 팽개치고 어디로 갔다고 그러던데. 살아있는 거 맞죠? 덕택에 책은 잘 팔리고 있어요. 뭐 워낙 작품 수준이 좋기도 했지만, 작가 이력이 이런 식이다보니까 아무래도 화제가 되던데요. 혹시라도 일부러 꾸민 일이면 가만 안 둘 거에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내는 거니까. 살아있으면 연락 좀 줘요. 부탁이에요.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팔 개월 동안 작품을 쓰면서도, 그는 사실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는 노트북이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있고, 끼니때마다 밥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차피 사막을 건너 도시 어딘가에 정착하더라도 이곳보다 괜찮은 환경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매일 밤 목을 조여 오는 죄의식만이 문제였지만, 어쩌면 그런 죄의식이 자신의 글에는 더 괜찮은 자양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야기꺼리 뿐이었다. 머릿속을 뒤져 예전의 아이디어들을 되새겼지만, 좀처럼 잘 조립되질 않았다. 밤이 깊어오고, 무의미한 파티 속을 헤매는 유령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다른 생각 따위를 할 여유는 없었다. 어떻게든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다가 다시 들려오는 창밖의 소음에 손을 멈춘 남자는 창가에 서서 정신없이 이야기하는 유령들을 내려 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나 많은 이야기, 죽어서까지 꼭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눈앞에 있는데.
남자는 종이와 펜을 들고 부리나케 로비로 내려갔다. 어디선가 나타난 양동이와 대걸레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빨리 가라고 했잖아요. 제 말 못 믿을 게 뻔하지만 아저씨 같은 사람은 정말로 많았… 남자는 여자를 뿌리치고 파티장으로 달려갔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벌게진 채 테이블을 내리쳐 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복을 입고 있었다. 괜찮은 전쟁소설 하나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남자는 조심스레 병사의 어깨를 두들겼다.
의외로 말이 통했고, 게다가 병사는 남자가 살아있는 사람이란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남자가 이야기해 달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는 정신없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약혼자와 징집령, 동부전선에서 당한 부상으로 후송당하는 도중 도착한 약혼자의 편지, 후송되는 곳으로 찾아오겠다는 소식을 듣고 광분했던 이야기, 이어지는 소련군의 추격, 고립, 탈출, 그리고 마침내 만난 약혼자의 대리인… 결국 병사가 약혼자에게 전하지 못한 이야기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소식인 것 같았다. 앞뒤 없는 이야기를 메모해 가며 정리를 마친 남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만약에 약혼자가 살아있다면, 찾아갈 거예요? 병사는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갈 겁니다. 죽어서라도, 꼭.
남자는 메모에 마침표를 찍고 호텔로 향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호텔 후문까지 걸어간 그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지만, 아내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지옥문을 홀로 걸어 나오던 오르페우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남자는 침울한 기분으로 문을 열고 호텔로 들어갔다. 문간에 서 있던 여자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에요?”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내 직업이 원래 이래. 이해해요.”
이해하라는 말은 누구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 남자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꾹 참으며 방으로 되돌아갔다. 책상에 앉은 그는 정신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창밖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타고 온갖 소음이 들려왔다. 이따금 기지개를 피거나, 제자리에 선 채로 창 너머 먼발치를 바라보는 일은 불가피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남자는 온갖 유혹들을 이겨가며 계속 글을 써 내려갔다.
이윽고 창밖이 조용해지고, 햇빛이 창틀을 넘어왔다. 창가에 다가가 테이블을 정리하는 지배인을 멍하니 내려 보며, 남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룻밤을 이겨냈다. 하지만 이런 밤들을 얼마나 더 이겨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설이 완성되자, 남자는 출판사 담당자에게 원고를 보냈다. 소설의 내용 이외에는 아무런 변명이나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상태였다. 원고를 완성한 날 밤에도 파티에 나가 다른 사연 하나를 적어서 돌아온 그는, 다시 다른 이야기를 쓰는 데에 매달렸다.
이야기를 받아 적고, 꾸미고, 완성해서 이메일로 보내는 작업이 계속됐지만 남자는 그럴수록 자신이 점점 더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령들의 이야기가 항상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부한 이야기만 한가득 건져온 날이면, 글을 쓰다가도 창밖을 헤매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패배할 것이 뻔한 승부였다. 유령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남자가 버텨내야 할 날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으니까. 남자는 가끔 미라처럼 말라붙은 채 책상에서 숨을 거둘 자신의 미래를 떠올렸다.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야기를 쥐어짜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버거운 일이었다.
어느덧 이메일에는 모르는 이들의 편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그는 독자들의 편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출판사 담당자가 보낸 답장은 휴지통에 넘어가 있었다.
-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지독한 작가주의에라도 빠진 거예요? 아니면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니까 거추장스러운 요식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독자들이 난리부리는 건 그렇다 치고, 이젠 경찰도 나섰으니까 어디 있는지 밝혀지는 날에는 알아서 해요. 보내준 단편들은 소설집으로 내기로 했어요. 장삿속이 지나치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들도 워낙 말이 많고 일단 사장님 결정이니까 어쩔 수 없죠. 동의를 못 구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뭐, 작품에 이름을 안 써놨다고 해도 읽어 보면 직접 썼다는 걸 알긴 하겠는데… 일단은 댁도 실종된 상태니까 정식으로 계약을 맺기도 뭣하고. 인세 챙길 생각 있으면 꼭 연락해 줘요. 살아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으니까.
남자는 피식 웃으며 방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한참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그 날 밤부터, 남자는 다시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유령들의 파티와 아내의 모습을 내려 보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곳에 더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버티고 있었다. 억지로 연장시켜 온 집행유예기간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밤, 여느 때처럼 창가에 서 있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령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 같았다. 한동안 이 호텔에 찾아온 손님도 없었으니 구원받을 유령도 없을 텐데. 그간 눈에 익은 유령들을 하나씩 찾아보던 남자는 결국 독일군복을 입은 유령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튿날, 아침을 건네준 여자는 소설로 유령을 구원했다는 남자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남자의 논리는 명확했다. ‘유령의 본능’ 이란 것이 기어코 이 사막과 호텔을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타고 세상으로 흘러간 것이다. 결국 이야기를 들어야만 할 누군가에게 건네진 소설은 그의 한을 풀어주었고, 아무도 사라지지 않은 채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열릴 수 있었다. 며칠 밤 동안 관찰을 거친 남자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 준 유령들이 차례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을 얻었다. 길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남자는 매일 밤 뒤뜰로 나가 유령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최대한 빨리 소설로 바꿔서 출판사에 보냈다. 그는 이메일 마지막에 짤막하게 덧붙였다. 지금부터 제가 보내드리는 모든 이야기를 출판해 주셔야 합니다. 그게 어렵다면 그냥 포털 같은 곳에 공개라도 해 주세요. 인세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 출판사 담당자는 짜증 섞인 답장을 보내왔다. 사장이 동의했으니 계속해서 작품을 출간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왕이면 지금 어디에서 작업 중인지를 밝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조금 주저하다가 명확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여자의 말대로 이곳이 저주받은 호텔이 아니라면, 굳이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말려야 할 이유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있는 곳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남자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졸고 있는 지배인에게 다가가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약 좀 할게요. 꼭 할 말이 있어서.”
이틀 후에 출판사에서 온 사람이 호텔에 도착했다. 지배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 빈 방을 안내해 주었다. 남자는 지배인이 나간 후에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가방을 든 채 문간에 서 있는 출판사 직원을 앉혀놓고 차근차근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내가 죽은 뒤 사막을 헤매다가 이 호텔을 우연히 발견했으며, 집필에 매진하기에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연락도 끊고 잠적해 있었다고. 호텔 뒤뜰에서 유령들이 밤마다 파티를 연다거나, 죽은 아내가 그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혹시나 그가 한밤중의 상황을 직접 목격한다면 이상한 짐작을 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 점에 대해선 확인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못 봐요. 유령들이 직접 예약해 준 사람 아니면 파티에 참가할 자격이 없거든요. 그러니 자기 맘대로 먹거나 마셔도 호텔에 갇히는 일 같은 것도 없겠죠.”
여자는 문 밖 복도에서 팔짱을 낀 채로 비딱하게 서서 남자와 출판사 직원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남자가 문을 닫고 나오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법이네요. 아저씨? 여태껏 여기에 외부인을 초대한 사람은 없었는데.”
남자는 쓴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출판사 직원이 돌아가고 나서, 남자는 경찰과 사막횡단 고속도로 관리공단 직원을 잇달아 호텔로 초대했다. 그러자 지도가 갱신되고, 고속도로 공식 안내책자에 호텔의 존재가 명시되었다. 한적한 호텔에 사람들의 발길이 스치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몇 편의 소설을 더 출간했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으로 창가에 기대어 사라진 유령들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주고 써 줄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이 구해내야 하는 아내의 이야기만은 영영 들어줄 수도, 써 줄 수도 없을 것이다. 끼니마다 남자를 찾아온 여자는 끊임없이 그 점을 상기시키며, 결국 성공할 수 없는 시도는 관두고 지금이라도 호텔을 떠나라고 권유했다. 죽은 사람들은 그렇게 알량한 방법으로 다룰 수 없는 법이라는 게 그녀의 일관된 충고였다. 하지만 남자는 기어코 호텔을 방문하기 시작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빈 방으로 안내하는 지배인을 살피며,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사람들보다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훨씬 시끄럽고, 끈질기며, 무섭다는 점을. 그러니 이제 그가 할 일은 그저 여력이 되는대로 아직 남아있는 유령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하며, 살아있는 자들의 소음을 못이긴 이 낡은 호텔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초반 한 달 정도 무상으로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던 지배인은 별안간 숙박비를 받기 시작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느 여행 잡지에 세월의 흔적이 고풍스럽게 남아있는 사막의 외딴 호텔에 대한 특집기사가 실렸다. 여행객들이 늘어나고, 호텔의 구석구석이 그들의 사진기에 실려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이렇게 외로운 곳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어느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을 호텔로 불러들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남자는 로비에 내려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자신의 책을 들고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사인을 해 주었으며, 주로 어디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느냐는 질문에 지체 없이 호텔 뒤뜰의 외로운 오아시스가 자신의 뮤즈 역할을 한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책이 출간된 날이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한가득 몰려들어 호텔 뒤뜰에서 파티를 벌였다. 남자는 샴페인을 흔들고 와인잔을 높이 들어 건배 제의를 하며, 사막 먼 곳의 어둠 속으로 쫓겨나 버린 유령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얼핏 잔인한 일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튿날 밤 다시 나타난 유령들은 아무도 남자의 사과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만을 목청껏 떠들어댈 뿐이었다. 남자는 측은함을 삼키며 유령들을 하나 둘씩 떠나보냈다.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밤마다 잠을 방해하던 소음들이 잦아들었다.
결국 어느 밤 창밖을 내다 본 남자는 아내가 홀로 뒤뜰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배인은 이제 큰 테이블을 설치하지도 않았고 불을 밝혀주지도 않았다. 살아있는 자들로 가득 찬 호텔 객실에서 근근이 스며 나오는 빛만이 황량한 오아시스 한 구석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슬픈 얼굴로 뒤뜰을 배회하다가, 이따금 멈춰 서서 먼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창틀을 꼭 쥐고 고개를 숙여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아침식사를 가져다 준 여자를 붙잡았다.
“술 한 잔, 했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말했잖아요. 술 같은 건 취급 안한지 40년이 넘었다고.”
“그럼 지금 지하저장고에 있는 와인은 40년은 넘게 묵었다는 소리겠네. 오늘 밤에 지배인님 모시고 같이 와.”
“지배인이요? 그 분은 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여자는 더 깊이 물어보지 않았다. 남자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밤이 깊어갈 무렵, 지배인은 여자와 함께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퍽이나 오래 묵은 것처럼 보이는 와인도 함께였다. 남자는 세 개의 술잔에 담긴 와인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작별인사 하려고 불렀어요.”
지배인은 말없이 잔을 손에 들었다.
“이 호텔,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올 겁니다. 어르신이 워낙 말이 안 통하니까 저한테 연락을 했더군요.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해 줬어요. 아마 이 호텔 주인은 1969년에 죽었을 테고, 지금은 사업자 등록도 안 한 사람이 세금도 안 내 가면서 불법으로 운영하는 중일 거라고. 여태까지는 나름대로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이젠 그게 쉽지 않을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무서우니까.”
술잔을 들던 여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배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어르신이 운영하고는 있지만, 결국 어르신도 이 호텔에 있는 유령이니까, 아마 누군가를 부르긴 불렀겠죠. 저는 아마도 그게 여기 있는 이 아가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로 옆에 두고 일을 시키면서도 자신이 할 말을 하고 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요? 아마 아가씨도 그런 마음 정도는 알고 있을 테고. 저도 골치 아프지만, 두 분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정말 골치 아프던데요. 그래서 그냥 과격한 방법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던가, 아니면 그냥 경찰한테 쫓겨나던가.
저주 같은 걸 만든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저는 있지도 않은 저주로부터 수십 명의 영혼을 해방시킨 셈이겠네요. 그러니까 그런 게 있건, 없건, 이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주가 아닌 무언가가 있다면 그걸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어르신이겠죠. 길 잃은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그건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느 쪽이던, 제 아내를 구해낼 수 있다면 전부 다 박살내 버릴 겁니다. 이제 당신들이 마지막 수순입니다. 자, 말씀하시기 어렵다면 한 잔 하실까요?”
남자는 자신의 술잔을 들어 두 사람 사이로 내밀었다. 입을 굳게 다문 지배인은 남자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술잔을 든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아저씨.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죠?”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우리가’ 함께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고 있을 걸. 어르신, 저는 이미 저 뒤뜰에서 기약 없는 잔치를 벌이던 사람들을 다 구해냈어요. 그러니 절 믿으셔도 좋습니다. 좋은 곳으로 가길 빌어드리죠.”
“이야기 같은 걸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거에요? 아저씨 바보에요?”
“할 말도 못 해서 끙끙대는 머저리 같은 유령 정도야 구원할 수 있겠지. 자. 건배할까요?”
지배인은 잔에 담긴 와인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잔을 잡았다. 셋은 동시에 잔을 부딪쳤다. 쨍, 경쾌한 소리와 함께 와인이 가볍게 출렁였다. 동시에 와인을 삼켜버린 셋은 역시 동시에 잔을 내려놓았다. 문득 지배인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그는 두 손을 내밀어 남자의 손을 부여잡았다.
“고맙습니다.”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별 말씀을.”
“내일부터는 저도 볼 수 없을 테고, 아내분도 볼 수 없을 겁니다. 아마 제가 그렇듯, 아내분도 아쉬움이 많이 남을 테니 우리들은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시간이 많이 남질 않았습니다. 어서 가 보세요. 저도 얘랑 둘이 있고 싶습니다.”
남자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거기 서 있던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내는 뒤뜰 한 편에 걸음을 멈춘 채 남자가 있는 방 창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깊었고, 아내의 얼굴은 그 어둠 속에 숨은 채 윤곽조차 흐릿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또렷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남편을 부르고 있었다. 오래 묵은 호텔의 저주가 깨지고, 모든 영혼들이 약속된 곳으로 갈 수 있게끔 해방된 순간, 그녀는 남편이 있던 곳과, 그가 이제껏 해 온 일들과, 머지않아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모두 알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남자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와 뒤뜰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뒤뜰로 향하는 문을 열자, 아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로 고개만 돌려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아내를 향해 달려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온기 없는 아내의 몸은 철사처럼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두 가슴 사이에서 아이가 힘없이 옹알거렸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눈물 흘렸다.
아내가 말했다. 잘 도착한 거야? 남자는 대답했다. 응… 아내가 다시 말했다. 자동차는 고장 안 났고? 엔진오일 갈 때가 됐는데… 남자는 대답했다. 응… 아내는 다시 말했다. 또 어디 가? 남자는 대답했다. 아니, 안 가. 아무 데도 안 가. 아무 데도…
밤이 깊어갔다. 호텔의 모든 불빛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차갑고 마른 아내를 끌어안은 남자는 끝도 없이 눈물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무 데도 안 가.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아무 데도…
지배인은 방문을 열었다. 언뜻 보기에 방은 깔끔해 보였다. 하지만 TV위에는 반쯤 피운 담뱃갑이 놓여 있었고 침대 시트가 묘하게 구겨졌으며 책상 위의 노트북도 살짝 기울여져 있었다. 지배인은 느릿느릿 걸어가 정리를 시작했다. 시트를 바르게 펴고 노트북을 책상 한 편으로 밀어놓고 가져온 행주로 책상을 닦았다. 먼지떨이를 꺼내 방 안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털어낸 지배인은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를 들고 올라왔다. 빈 접시는 책상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지배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접시를 들고 TV 위의 담뱃갑을 아침식사가 담긴 접시 옆에 놓은 뒤 문으로 걸어갔다. 방문 밖에 선 그는 방 안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방문은 자동문처럼 스르륵, 말끔하게 닦인 바닥 위를 미끄러져 조용히 닫혔다. 아침을 맞은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사방에서 아련하게 들려왔다. 한 뼘쯤 열린 창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들썩였다.
적막한 방 한가운데에 사막의 아침햇살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 Eagles 의 노래랑 관련있는 거 맞습니다. 노래만큼이나 기네요;
그 노래 가사에 인상적인 게 많아서 이리저리 인용을 많이 했지만서두
Some dance to remember, Some dance to forget... 요걸 끝내 못 넣어서 아쉽습니다.
* 이렇게 전형적인 글을 쓰다보니 제가 글쓰기에도 소질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겠군요.
뜬금없이 배가 가라앉질 않나, 자살을 하질 않나... 참 여러모로 이번주는 절망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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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H는 역시 HOTEL인가..
내일 원고쓰다 심심할때 읽어보도록하지.ㅎㅎ
친구는 어디있는데? 경쟁업체가 한둘이어야지.ㅋㅋㅋㅋ
국어 출판사가 그렇게 많은 줄은 회사 들어가서 첨알았네.
25개가 넘더라고..
얼굴은... 그냥 신입의 신고식이라고나할까나..;;;-
빈군2010/04/01 23:55 [Edit/Del]"역시 호텔" 이라니 예상이라도 하신건가요...
(하긴 저도 처음부터 어쩐지 정해둔 단어긴 했지만)
친구는 교과서 만드는데요. 천재교육이라고
비상때문에 야근좀 했대요 ㅋㅋ
아 괜히 3자 입장에서 보니 재밌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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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천재? 거기 우리과 후배도 있는데;;
당연히 국어교과서겠지?
이번에 중등 국어교과서가 검정으로 풀리면서
천재에서 3종이나 내는 바람에 빡셌을꺼야.
우리는 2개 내서 하나 떨어졌거든. 암튼 난 문제집이라..ㅋㅋㅋ -
엉.. 아마 다 알껄?;;
그 후배 연락할 일이 있어서 함 물어 봤는데 부서가 달라서 좀 가물가물 한가봐.
근데 어차피 학번은 선배겠지?ㅋㅋ 02니까 내 후배는.
Ghosts of youGhosts of you
Posted at 2010/03/23 21:32 | Posted in 잡글들/소설이 편지는 행운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그래요, 당신이 무슨 생각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끝까지 읽어보세요.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니까요? 당신은 아마 이전에도 비슷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을 겁니다. 무시하고 뭉개버린 지 4일이 아니라 4년, 혹은 40년이 지났는데도 특별한 불운 같은 건 찾아올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는 분도 계시겠죠. 혹은 그 편지의 내용을 믿고 4일 안에 7명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운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확실히 맹세해 드리죠. 이 편지는 진짜 행운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됐다는 그 ‘첫’ 행운의 편지를 작성하고, 글귀에 영원히 지속될 마력을 불어넣은 장본인입니다.
원작자로서 자신 있게 말하는데, 당신들이 받았던 편지는 죄다 가짜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제가 마력을 불어넣은 진짜 행운의 편지는 1963년 케네디 암살사건을 마지막으로 이렇다 할 효력을 발휘한 적이 없어요. 그래요. 그 가짜 편지에도 명시된 그 사건 말입니다. 대충 짐작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 저는 이 편지를 두 번 개정했습니다. 1930년 복권 당첨 사건이랑, 1963년 케네디 암살사건 때 말이죠. 그런데 원본을 개정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가짜도 똑같이 개정을 해 버리더군요. 전 그네들의 작태가 너무 치졸해서 더 이상 상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원조 맛집은 진짜 원조나 100년 전통의 원조란 간판을 달지 않아도 빛을 발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상엔 맛집 블로그는 수없이 많아도, 원조 행운의 편지를 감별하는 블로그 같은 건 없더군요. 당신들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보통 사람들 눈에는 똑같아 보이는 편지일 뿐이니까요. 설령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아는 마법사가 제 글을 읽는다고 해도, 미치지 않은 이상 그걸 섬세하게 분석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진 않을 겁니다. 데미지도 어마어마할뿐더러 정체가 발각되는 순간 테크노크라시들이 미친개처럼 달라붙을 테니까요…
무슨 뜻인지 아리송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어쩌면 소용없는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마지막으로 개정판을 한 번만 더 내 보기로 했습니다. 저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그냥 짜증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들이 제 말을 믿고 주변 사람들에게 뜻밖의 행운을 전파하건 말건, 그건 이미 제겐 100년이나 지난 관심사일 뿐입니다. 저는 그냥 진짜가 가짜를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할 겁니다. 확실히 해 둘까요.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더 믿어보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속는 셈 치는 순간 당신들은 이미 속은 겁니다. 당신들은 저를 믿어야 합니다. 제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more..
쓰고 보니 별 설득력이 없는 얘기 같군요. 일단은 제 편지를 똑같이 복제해서 사방팔방에 뿌려댄 그 작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정확히 무슨 목적과 신념으로 움직이는 작자들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똑같은 짓을 자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사부님의 사부님이 갖고 계시던 기록입니다. ‘위대한 분께서 눈을 떠 첫 태양을 밝히시니 이를 시기한 유령들이 두 번째 태양을 만들었다. 이에 격노하신 그 분이 세 번째 태양을 밝히시니 유령들은 이를 또다시 흉내 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태양을 만들었다. 그늘진 낙원으로 매시간 빛이 스며들어 어리석은 인간들이 기뻐하였다. 위대한 분이 이를 보시며 크게 실망하시더라.’ 이게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태양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지금처럼 별 볼일 없는 불덩이 따위가 아니라 진정한 생명과 환희로 가득 찬 빛의 근원이었죠. 그런데 이 ‘유령’ 이란 작자들이 창조주를 흉내 내서 시시때때로 가짜 태양을 띄우기 시작한 겁니다. 창조주도 저처럼 짜증이 났는지 한 번쯤은 개정판을 냈던 것 같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인간들이 좋아한다는데. 기록을 더 살펴보건대, 결국 오늘날 진짜 태양은 더 이상 뜨지 않습니다.
앞서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했을 겁니다. 저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뜻있는 누군가가 창조주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 끝에, 감복하신 창조주께서 저처럼 파이널 에디션 태양을 띄우기로 했다고 해 봅시다. 기도를 드렸던 사람은 아마도 이제야 진짜 태양이 떠오른다고 홍보에 열을 올릴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속는 셈 치고’ 그걸 믿어보기로 한다면? 파이널 에디션은커녕 궁극의 파이널 에디션 태양이 뜬다손 치더라도 여러분은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다음 날이면 유령들이 그걸 그대로 흉내 낸 또 다른 태양을 띄울 테니까요. 이 작자들이 창조주의 위대한 손길도 흉내 낼 수 있는 거냐고 물으실 텐데, 진정한 생명과 환희라는 거, 생각보다 조작하기 쉽습니다. 당신들은 너무나 나약한 주제에 자존심은 유달리 강한 짐승이기 때문에, 어떤 사실이든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해 버리는 습성이 있거든요.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진짜 태양이 뜨는 아침이라고 해봐야, 당신들 입장에서는 그냥 평소보다 유난히 맑은 아침일 뿐이니까요. 편지를 보내서 행운이 온 게 아니라 내 노력의 대가로 마땅한 결과가 뒤따랐을 뿐이고, 편지를 안 보내서 불운이 찾아온 게 아니라 그냥 운수가 안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마 딱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이쯤 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어차피 창조주가 만든 태양이나 ‘유령’ 이란 작자들이 만든 태양이나 내가 느끼기엔 별다를 게 없다면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되는 거냐고. 확실히 대답해 드리죠. 문제가 됩니다. 제 원본 편지에는 분명히 마력이 있지만 복제본 편지에는 마력이 없다는 걸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근거란 것이 당신들의 알량한 믿음밖엔 없다고 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는 절대로 뛰어넘지 못할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묘한 것은 여러분이 그런 차이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짜로 차이가 없어져 버린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저는 제 편지가 지구를 수십 바퀴 돌면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뿌리고 다녔는지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그걸 제 편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앞선 개정판에 수록된 1930년과 1963년, 두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이건 타임 패러독스와 온갖 데미지들을 무릅쓰고 시공간을 수없이 돌아다닌 끝에, 사람들이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일 법 한 사건들만 뽑아놓은 겁니다. 이외에도 비교적 알아내기 쉬웠던 자잘한 사건들은 제법 있어요. 집나간 강아지가 제 발로 돌아온다던가, 우연히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초기 암세포가 발견됐다던가, 기말고사 전날 일찍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시험장에선 주사위만 굴렸는데 절반 이상 정답이었다던가… 그런데 그럼 뭐합니까? 사람들이 믿질 않는데. 그러다보니 이젠 원본 편지를 받건 복제본 편지를 받건 편지에 있는 지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요. 결과적으로는 분명히 좋은 뜻으로 만들었던 제 마법도 스리슬쩍 사라지게 되는 거죠. 이런 일이 어디 제 편지에서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령’ 들이 정말 유령처럼 정체를 숨긴 채 어디 천 길 심연에서 암약하는 악마쯤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천만에요. 유령은 유령일 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생기는 바로 그 유령. 그리고 제 눈에는 이미 당신들의 유령도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죽은 사람들이 이승에서 한을 못다 푼 나머지 이딴 짓을 하고 있단 말은 또 아니고… 제 사부님의 사부님이 남기신 기록을 한 번 더 꺼내야겠군요. 기록에 따르면, 비록 당신이 멀쩡히 숨을 쉬고 자가 증식 및 치유 능력도 갖추고 있으며 적당한 영양분만 공급되면 자연히 자기 내부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유기화합물, 그러니까 테크노크라시들이 흔히 말하는 ‘생명체’ 라 할지라도, 당신은 이미 생명을 잃고 유령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창조한 존재에 숨결을 불어넣고 하늘 아래 유일한 것이라 칭하시니, 이에 세상은 오롯한 것들로 가득할 것이며 숨결을 잃은 것들은 유령이 되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하시더라.’ 그러니까 당신 내부의 ‘오롯함’을 지탱하는 무언가가 모종의 이유로 사라져 버리고 난 후라면, 당신이 죽건 살았건 상관없이 당신은 이미 유령입니다. 그리고 저의 짜증을 유발하고 있는 그 복제꾼들과 한 패거리이기도 합니다. 좋게 말해서 한 패거리라는 거고,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 작자들에게 놀아나는 똘마니에 불과합니다.
천지창조와 생명에 관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저만의 종교적 믿음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됐으니 곰팡내 나는 기록은 이쯤에서 그만 보도록 하죠. 이제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이런 생각 해 본적 없습니까? 나는 분명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긴 한데, 사람들은 자꾸 나를 보면서 엉뚱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한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자신의 생명이 공격받는 순간을 확실하게 인지한 겁니다. 그래요, ‘진짜’ 당신을 공격한 유령이 이미 있었다는 거죠. 공격방식은 제 편지가 복제되는 방법이랑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치밀하고 또 정교하게, 당신이 느끼기에도 별다른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당신과 똑같은 가짜를 만들어서 세상에 전시하는 거죠. 저 같은 사람은 그런 공격의 순간을 확실히 인지하고, 가짜를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불태워 버리는 일이 가능합니다만, 여러분 같은 보통 인간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예 공격을 받는지도 모르고 생명을 빼앗겨 버리는 게 보통이겠지만, 공격을 인지했더라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뿐입니다. 난 그런 사람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그런 사람이기도 하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 당신이 유난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서 전자를 선택했더라도 전망은 그다지 밝지 못합니다. 유령들은 집요한데다가 그 숫자도 어마어마하니까요. 공격은 언젠가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순간, 진짜 당신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유령들이 만들어낸 가짜가 그 자리에 들어앉을 겁니다. 당신은 가짜의 몸으로 걷고 가짜의 머리로 생각하고 가짜의 입으로 음식을 삼키겠지만, 뭔가 중요한 걸 잃어버렸다는 기분이 들더라도 또 그놈의 못된 버릇 때문에 그저 혼자 중얼거리겠죠. 피곤해서 그런가봐. 천만에. 당신은 이미 생명을 빼앗겼고, 유령이 된 겁니다. 그리고 대다수 인간들은 한 번 빼앗겨 버린 생명을 다시는 되찾아오지 못합니다. 그저 좋게 풀려야 그나마 이용은 덜 당하는 유령으로 잠자코 그림자 속에 묻혀버릴 뿐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또 가짜를 만들어 아직 공격당하지 않은 인간들의 생명을 빼앗는 데에 혈안이 될 뿐이죠. 이런 일이 공공연히 진행되는 중이니까, 세상은 머지않아 유령들이 만들어낸 고약한 가짜들로만 가득 차 버릴 겁니다. 해결책? 해결책이 있다면 그건 진짜와 가짜의 명백한 차이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뿐이겠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신의 구원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믿으세요. 죽기 싫다면.
저를 더 짜증나게 하는 건, 유령들이 진행 중인 음모가 아예 세상 전체를 집어삼켜 버릴 기세라는 겁니다. 그럴싸한 가짜 창조주를 만들어서 진짜를 축출하는 작업은 이미 성공했다고 봐야죠. 신이 사망선고를 받은 게 아마 19세기였던가요? 집집마다 TV가 들어앉아서 정교하게 편집된 가짜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도 그렇고, 이미 생명을 잃은 인간들이 방송국이나 신문사를 차리고는 이 얘기 저 얘기를 제멋대로 떠들어 대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멀쩡히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말해버리는 그림은 어떻고요? 아니, 그게 도대체 왜 파이프가 아니랍니까? 가짜를 쏟아내서 진짜를 그 속에 파묻히게 만들더니, 이젠 아예 진짜가 왜 진짜인지도 의심하게 만들어 버리는 게 지금 유령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입니다. 저는 이들의 목적을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이 이대로 유령들에게 질질 끌려가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버린다면… 뭐, 이미 창조주께서 그 결과에 대해선 명확하게 밝히고 계시는군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질 것’ 이 뻔합니다. 파괴되는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지독하죠. 마치 지금 제 편지가 당신들에게 취급받고 있는 것처럼, 있으나 없으나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존재로 세상이 꽉 차버리고,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자체가 있으나 없으나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짜증나는 일입니다. 이 작자들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요?
흥분해서 그런지 글에 두서가 없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오죠. 어쨌거나 지금 저의 편지와 같은 진짜들이 위협받고 있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이들을 ‘오롯함’ 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기둥이란 것이 당신들의 믿음과 같이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당신들에게 믿음을 구걸하거나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마법사이고, 처음으로 그 편지를 쓸 때보다는 충분히 강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제 편지에 담겨 있는 마법을 증명하는 일쯤은 저 자신의 신념만으로 충분히 해 낼 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합리적인 증명과정을 거친 믿음을 갖게 해 드리지요. 시작해 볼까요.
4일 안에 이 편지가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습니다. 정확히 편지의 이 부분을 읽는 순간부터 96시간입니다. 96시간 후에 심장마비로 바닥에 쓰러질 겁니다. 어떤 수를 써도 소용없습니다. 살고 싶다면 당신을 제외한 7명의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세요.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이메일로 보내도 상관없고요. 불특정 다수가 글을 읽게 되는 곳, 예컨대 공개 게시판 같은 곳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같은 글을 7번 올려야 합니다. 서로 다른 주소를 사용하는 게시판이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요. 그리고 적어도 한 명은 당신의 글을 읽어야만 합니다. 편지를 보내거나 게시판에 올렸는데 아무도 읽지 않았을 경우, 당신은 여전히 4일 후에 죽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이 편지를 받은 당신의 신원을 내일 아침 신문과 포털 사이트에 공개할 겁니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번호 같은 것도 함께 해 드리죠. 이 편지는 7명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이외에 6명의 사람이 함께 광고에 실리는 셈입니다. 7명이 편지를 다 읽고 나면, 제 지시를 어겼을 경우 당신들이 죽게 되는 시각을 다시 공개하겠습니다. 어때요. 불쾌하십니까? 불법적인 개인정보 침해라고요? 어쩌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제 당신들의 운명이나 구원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방금 위와 같은 글을 받고 읽기까지 마쳤습니다. 묵혀둔 이메일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만, 다 읽고 나서 발송된 시간을 확인해 보니 고작 두 시간 전이군요. 편지의 내용에 따르자면 저 말고도 6명이 똑같은 편지를 받은 모양인데, 아마 제일 빨리 읽은 사람은 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다못해 내일 확인하기만 했어도 이 양반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들이밀고 있는 ‘합리적인 증명과정’ 이란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느 정신 나간 신문사나 포털 사이트가 그런 광고를 실어줄까 싶습니다만, 뭐 지 입으로 자기가 마법사라고 했으니 뭔가 방법이 있겠죠. 마법을 써서 해킹을 한다던가… 여하튼 지금으로선 이 사람이 진담을 하고 있는 건지, 세상이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은 나머지 그저 조금 공들인 농담을 늘어놓고 있는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저는 기분이 나쁩니다. 이게 진담이라면 이렇게 폭력적인 방법을 써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드는 행태가 맘에 들지 않고, 이게 농담이라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고작 이 정도로밖에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고방식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굳이 주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편지를 보낼 겁니다. 지시대로 무작위로 선택된 일곱 명의 사람, 혹은 게시판에 말이죠. 그리고 혹시라도 같은 편지를 받았거나 받게 될 다른 사람들도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이 편지의 진실성을 믿어 보라는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속는 셈 치고’ 믿어보란 말씀을 드리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저 이 작자가 ‘합리적인 증명과정’ 을 거치겠다고 했으니, 어디 한 번 정말 합리적으로 실험을 거쳐 보자는 말입니다. 실험은 신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정말 이 편지가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지시대로 편지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 생기겠죠.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기는 걸까요?
이 편지는 그 부분에서 입을 닫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합리적인 실험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왜 그랬는지 짐작이 갑니다. 어떤 일이 생기게 해 줘야 할지 자기도 잘 몰랐던 겁니다. 불운이라면, 우리 모두를 동일하게 기다리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있습니다. 죽음이죠. 뭐 이것조차도 어떤 사람들에겐 예외가 되긴 합니다만, 어쨌든 ‘심장마비로 인한 죽음’ 이란 것은 ‘운수’ 의 영역에서 그 누구에게나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나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운이라면? 편지를 받게 될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이 동일하게 원하고 있을 최고의 상황은 무엇일까요? 복권당첨? 사랑하는 사람이 별안간 고백을 하는 것? 뜻밖의 승진? 저녁내기 사다리타기에서 이기는 것?
모르죠. 어떻게 압니까? 이걸 증명하려면 이 마법사란 사람이 매일매일 신문광고를 해 줘야 할 겁니다. 오늘은 동부이촌동에 사는 A씨가 편지를 받았는데, 지시에 따르면 언제 어떤 일이 생길 것이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몇 월 며칠 몇 시에 심장마비로 죽게 될 것이다. 라고. 하지만 내용을 훑어보건대 이 마법사는 테크노뭐시기란 사람들이랑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마 정체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활동하기엔 무리가 따르시겠죠. 게다가 굳이 그런 비밀단체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경찰과 정부란 조직이 있습니다. 실험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경우 정해진 시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면, 반쪽짜리 실험은 가능하겠죠. 하지만 그마저도 지시에 따랐는지, 따르지 않았는지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죽어버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증언뿐입니다. 편지가 꼭 체신행정이나 인터넷을 따라서 흔적을 남기며 전달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손으로 필사해서 개인적으로 건네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죠. 결국 이 마법사가 합리적 실험 운운하며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은 인질극보다 나을 것이 없는 저질 협박일 뿐입니다. 인간들의 운명이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짜증이 나서 써 갈겼다고 했나요. 이런 식의 짜증이 이성적 사고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 증명하는 실례가 되겠군요.
일단 편지의 내용을 신뢰해 보는 것을 전제로 여기까지 이야기를 끌고 왔으니, 이 사람이 늘어놓고 있는 현실인식에 대해서도 한마디쯤 하는 것이 좋겠군요. 그러니까 ‘유령’ 들이 만들어낸 가짜가 진짜를 감추고, 결국에는 죽여 버리고 있다는 것이 이 마법사가 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 ‘유령’ 이란 건 엄청난 비밀조직이나 심연에 숨어 있는 악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을 지니고 있는 세상 모든 존재가 모종의 이유로 그 ‘오롯함’ 을 잃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다르게 되는 죽음의 모습이고요. 세상엔 유령들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지금은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일지라도 필연적으로 유령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양반의 논리입니다. 종국에는 우리들의 우주 전체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서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거죠.
섬뜩한 예언이긴 합니다만 귀담아 들을 가치는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언젠가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 양반의 논리에 따르자면 결국 우리 모두는 언젠가 유령이 될 운명이에요.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주어진 한계 속에서 새로운 생명과 의미를 만들어 내는 건 창조주나 신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이란 건 죽음과 무의미 속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란 말이 있는 거죠. 이건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낡고 낡은 오리엔탈리즘만 조금 파고들어도 분수처럼 쏟아져 나올 주제니까요. 헌데 이 양반은 생명의 종말을 이야기하면서도 생명의 탄생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반쪽짜리 주장에 불과하지만, 한번 순순히 받아들여 볼까요? 그래요. 우리는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무의미와 가짜를 재생산해서 다른 생명을 빼앗습니다. ‘유령’ 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건 생명이란 게 원래 그따위로 생겨먹은 거라 그런 겁니다. 이 양반이 쓴 원본 편지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마법사란 양반은 복제를 증오해요. 원본이 가지고 있는 ‘오롯함’ 을 빼앗고 위협하는 행위니까. 그런데 웃기는 게 뭔지 압니까? 이 양반이 ‘진짜’ 의 견본이랍시고 들고 나온 원본 행운의 편지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속성이 다름 아닌 복제라는 거죠.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편지를 복사하건, 필사하건, 어떤 방식으로든 복제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령들이 시도한 마법적인 개입 같은 게 없어서, 이 마법사가 정말 힘차게 불어넣었던 ‘행운과 불운의 힘’ 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채로, 인간들의 굳은 신뢰까지 얻어낸 편지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그건 진짜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제 생각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가 가지고 있던 요망한 술수만 그럴싸하게 흉내 내고 있을 뿐, 그건 가짜에 불과합니다. ‘진짜’ 행운의 편지를 진짜로 만들던 마법의 구절 하나를 꼽으라면 전 이 부분을 선택하겠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불신과 신뢰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을 유혹하는, 아주 매력적인 구절이죠. 헌데 원본 행운의 편지가 진짜로 인정받고 세상에서 유통되게 되면 이 구절의 위력은 휘발되어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편지를 미신이라고 치부한 탓에 가짜가 되어버린 것처럼, 사람들이 이걸 사실이라고 여길 때에도 똑같은 결과가 발생한다는 거예요. 상상해 볼까요? 그런 세상이라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아마 불운이 닥쳐 올까봐 고민하거나 불안해 할 것 없이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편지를 이곳저곳에 보내겠죠. 편지를 보내고 나서 확인 차 전화도 할 겁니다. 그렇잖아도 행운이 필요하던 참인데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밥 한 끼 사는 일도 있을 테고, 괜히 일만 늘었다고 투덜거리면서 꾸역꾸역 복사본을 만들어 부치는 사람들도 있겠죠. 행운의 편지가 아파트 관리비 청구서처럼 취급받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어때요, 진짜가 의심의 여지없는 진짜로 취급받으니까 이젠 짜증이 좀 덜 나시나요?
제가 이 마법사라면 그런 현실 역시 여전히 짜증날 겁니다. 진짜 행운의 편지의 핵심은 사람들을 행운이란 당근으로 유혹하고, 불운이란 채찍으로 위협해서 정말 믿기 어려운 마법과 같은 술수가 이 땅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신념을 자극하는 데에 그 방점을 찍고 있으니까요. 편지가 불러올 미래는 괄호 속에 잠긴 채 무궁무진한 가능성만을 남겨두고 있었죠. 4일 안에 편지를 복사해서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노력을 통해 소중한 이에게 뜻밖의 행운을 전파할 수 있는 놀라운 세상이나, 그 작은 행동 하나를 귀찮아하는 사람들에게 불운이라는 인과응보의 징벌이 돌아가는 심판의 날을 부를 가능성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나 아름다운 가능성들은, 죄다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만 진짜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을 뿐이에요. 이미 실현되고 복제돼서 현실로 튼튼히 자리매김한 가능성들은 그저 진짜를 흉내 내고 있는 가짜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이 마법사가 이야기하는 대로 ‘유령’ 에 불과할 수도 있겠죠. 이런 전제에 동의하신다면 저 역시 세상이 유령과 유령들이 만들어낸 가짜들로 가득 차 버리는 것은 끔찍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이런 식이라면 이 마법사 역시 자신이 말하고 있는 ‘유령’ 들과 한통속인 것은 물론이고, 이 마법사가 만들어 낸 진짜란 것도 아주 짧은 순간만 진짜였을 뿐입니다. 별로 서글플 것도 없어요. 유일한 것이 유일한 것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 이유는 유일하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기 때문이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생명은 무의미와 죽음 속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가령 가짜 태양이 천지창조 이래로 매일같이 세상을 밝히는 작업을 해 주지 않았다면, 이 마법사는 단순한 불덩이가 아닌 생명과 환희로 가득 찬 ‘첫 번째 태양’ 에 대해서 이토록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요컨대 저도 진짜와 가짜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걸 가르는 기준이 인간들의 신념이란 점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진짜’ 는 가능성과 빈칸과 아주 잠깐 빛나는 순간의 균열로만 존재할 뿐이니까요. 그리고 정도만 각기 다를 뿐 우리는 모두 ‘어떤 찰나’ 를 스쳐간 빛나는 순간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딴에 복제를 업으로 삼는 유령이 될 팔자라는데, 진짜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가르쳐주거나 믿음을 강요하지 않더라도 모두들 알고 있어요. 태양이 진짜 태양이었던 순간, 창조주가 진짜 창조주였던 순간, 행운의 편지가 진짜 행운의 편지였던 순간, 그리고 나 자신이 진짜 ‘나’ 였던 순간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러니까 그와 비슷한 가짜들을 만들어서 세상을 채워나갈 수 있는 겁니다. 뭐 일말의 희망 같은 것도 있을 겁니다. 정말 ‘생명과 환희’ 로 가득했던 순간들이 다시금 되풀이되기를 바란다던지… 하지만 우리는 원본 행운의 편지를 썼던 마법사나 첫 번째 태양을 띄웠던 창조주와는 달리 어마어마한 의지도, 기똥찬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그 대가로 그나마 살아있던 진정한 순간들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무의미와 죽음과 망각, ‘유령’ 만이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의 삶이 세상을 망각 속으로 우겨넣는 작업이라고 말해버린다면, 뭐 그것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만, 저는 그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 편이 합리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을 이런 악질 편지의 지시를 따르거나 따르지 않고 불쾌해하는 것 보다는 한결 더 가치 있는 일 같군요.
아, 불필요하게 글이 길어졌습니다. ‘조금 더 희망적인 이야기’ 가 무엇인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차차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원문에 붙이는 주석으로 치기에는 꽤나 주제 넘는 내용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가 희망찬 이야기를 글로 옮기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증상이 있어서 말이죠. 이만 줄이죠. 아마 이렇게 글을 올리는 건 ‘편지를 보내는’ 횟수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네요. 가만있자. 그러면 이 편지는 진짜인가요? 아니면 가짜인 건가? 하지만 난 흉내 같은 건 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편지는 행운의 편지입니다. 진짜 행운의 편지입니다. 어떤 망할 테크노크라시 놈이 장난을 쳐 놓긴 했지만, 저 역시 이번만은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여전히 제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다시는 구차한 변명 같은 걸 할 기회가 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간절하게 말씀드립니다. 진실은 사냥당하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광고가 두 차례 나갔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예, 어떤 위협이 닥칠지 뻔히 알지만 해킹을 시도했습니다. 그 광고대로 저 가증스러운 주석을 작성한 마법사를 제외한 여섯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두 저 주석을 읽고 제 편지를 우습게 여긴 나머지 지시를 따르지 않았죠. 다만 저 주석의 작성자는 지시대로 7명의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앞으로 3일 이내에 일곱 사람이 더 죽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거기서 끝이겠죠. 저는 능력이 닿는 대로 여러분에게 그 사실에 대해 알리려고 노력할 겁니다만, 지금처럼 가짜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예. 저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모든 일간지와 뉴스 포털에서 편지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고 떠들고 있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진실이 죽어버린 겁니다.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 철없는 낙관론 따위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은 당신들의 유령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진짜’ 는 가능성과 빈칸과 아주 잠깐 빛나는 순간의 균열로만 존재한다고 했었나요? 그래요. 온통 넋 나간 유령들만 가득 새겨진 이 세상 어디에 가능성이나 빈칸이나 잠깐 빛나는 균열을 새겨 넣을 자리가 있는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한 대로 ‘무의미와 죽음과 망각’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피어 낼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볼 겁니다. 아마 기적이 따르기 전에는 그런 일 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에 내 목숨을 걸어도 좋습니다. 아니, 매사에 자신만만한 당신들은 애초에 기적 같은 건 믿지 않을 테니 이런 내기가 불가능한가요?
제 눈에는 여전히 당신들의 유령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유령들과 싸워서, 심각하게 굳어가고 있는 세상에 작은 균열이라도 만들어 내는 것이 저의 변함없는 목적입니다. 그러니 제 지시 역시 여전합니다.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은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죽기 싫다면 당신을 제외한 7명의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세요.
아시겠습니까?
(2010. 3. 23)
* 마법사의 이미지는 WoD - Mage 세계관에서 따왔습니다. 뭐 어쩌면 전체적인 내용도...
* MCR의 노래 Ghost of you 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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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도하다. 난 읽는 것도 벅찬데, 쓰는 것까지 하다니.
그나저나 이거 읽어야 되는거야 말아야 되는거야.;;
진짜 '행운의 편지'라니..ㄷㄷㄷㄷㄷ-
빈군2010/03/24 18:00 [Edit/Del]사실 쓰는거보다 읽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중요한 것처럼...
널리널리 읽으시라고 올려둔 것 아니겠습니까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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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혹시나 너의 "행운의 편지" 낚시가 아닌가해서 ㅎㅎ
이거 Z까지 다쓰면 다시 원고 좀 정리해서 우리 출판사로 가져와
출간해줄테니..완자 뒷면에 실어 줄께.ㅋㅋ
Farewell, my loveFarewell, my love
Posted at 2010/03/17 22:44 | Posted in 잡글들/소설 늦게 일어난 탓에 기분이 나빴다. 그래, 그게 문제였던 거다. 기분이 나빴던 탓에 모든 일이 이따위로 이상하게 풀린 거다. 그러니까 사람은 일찍 일어나고 봐야 한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질 때 침대를 툭툭 털고 일어섰더니,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떠 있고,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하거나 혹은 잡스러운 웬갖 것들이 나만 홀라당 빼놓고 바쁜 하루를 시작해 버렸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먼저 집을 비운 아내가 아침 여덟 시에 보낸 문자나 점심시간에 찍혀 있는 부재중 통화 기록 같은 것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대처하기가 싫어지는 법이니까. 대체로 그런 연락의 목적이란 건 밥은 밥통에 있고 반찬은 냉장고에 있으며 국은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있으니까 부디 알아서 처먹도록 하세요. 정도로 뻔한 내용인 법이잖아? 한동안 나 볼 생각 하지 마, 라던가 애는 친정에 맡겨둘게, 같은 문자가 와 있을 줄 알았다면, 설령 어떻게 끌고 왔는지도 모를 내 자동차 트렁크에 누군지도 모를 사람 두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두 사람 모두 호흡이 정지한 상태였다는 게 확인 되었더라도 일을 이따위로 방치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아내한테 전화 한 통 정도는 할 정신이 있었겠지. 3년 남짓한 결혼생활 동안 아무리 개차반직전인 남편이었다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이었고, 이런 상황에 놓인 남편은 보통 아내에게 나한테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정도 되는 말을 전할 자격은 갖고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도대체 내가 왜 늦게 일어났더라?
어디선가 내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그걸 몰라서 물어?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다. 범인은 술이다. 술을 쫌 많이 마셨다. 그것도 아마 모르는 사람이랑 마셨던 것 같다. 술자리가 시작될 때부터 그랬다는 말은 아니고, 아마도 3차나 4차쯤 되는 시기에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처음 보는 남자 하나, 여자 하나를 양 옆에 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흔들었고. 그 때 나랑 같이 있던 그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난감한 표정? 뜬금없이 달라붙은 이 혹을 어떻게 떼어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 아니다. 때마침 그 사람들 역시 독한 취기와 그보다 독한 사연들에 휘감긴 채로 세상의 고민은 자기들이 다 짊어진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퍽이나 눈치가 빠른 편이라서, 아무리 만취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나를 귀찮아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례한 짓을 저지르거나 함부로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아내의 무수한 제보에도 불구하고 장모님이 아직까지 나에 대한 신뢰를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 정체 모를 남녀와 술을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네들이 진정으로 고민하고 있던 사안이 무엇이었는지도 솔직히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술 때문에 끊긴 필름이란 것이 대체로 그렇듯, 발작적으로 편집된 점프 컷 같은 영상들만 드문드문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음성과 영상의 불일치가 돋보이는 이 불확실한 기억들을 인내심 있게 조사하다 보면, 기어코 단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장면 하나가 퍼뜩 떠오른다. 그 장면에서, 나는 양 팔을 벌려 두 남녀를 내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옆집 부부싸움 내용을 몰래 엿들은 아주머니처럼 속삭이고 있다.
“…사실 그게 우리 마누라에요.”
뭐가 우리 마누라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more..
내 소원대로, 나는 해가 질 무렵에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는 기분이 나쁘거나 좋지는 않았고 다만 깜짝, 놀랐다. 아침 - 아니다, 점심 때 내가 방치해 버린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 나만큼이나 과음한 천사, 혹은 강력사건 전문 우렁각시가 찾아와 내가 잠든 사이에 모든 일을 말끔하게 처리해 주지 않았다면, 아직 내 차 트렁크 안에는 시체 두 구가 있는 것이고 이 집에는 아내도, 아이도, 밥도 반찬도 국도 없이 접시 위에 덩그러니 놓인 계란 프라이만 굶주린 파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침대 위에 멍청히 앉은 채 이불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덜덜 떨다가 조심스럽게 아내를 불렀다. “여보오…?”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노을빛이 구석구석 닿아 긴 하품을 내쉬고 있는 집안은 메아리가 울릴 지경으로 적막하기만 했다. 그제야 나는 핸드폰을 열어 아내의 문자를 확인하고, 아내의 전화기가 이미 꺼져 있는 상태란 것도 알아냈다. 나는 답답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장모님한테 전화해야 하나, 경찰에 전화해야 하나, 어젯밤 나와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친구들한테 전화해야 하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세 가지 보기 중 마지막에 해당되는 녀석 하나가 때마침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나는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헌데 녀석은 나름대로 다급한 나보다 더 다급하게 들리는 목소로 먼저 말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너네 마누라 결국 간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가긴 어딜 가?”
“그 에덴인가 뭔가 하는 별나라 말야. 오늘 뉴스 떴던데? 기상 관계로 출발일이 당겨져서 전 승무원들한테 소환 명령 떨어졌다고. 마누라 집에 없구나, 지금? 넌 정말 안가는 거야?”
아아, 에덴.
입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린 나는 부리나케 거실로 튀어나가 TV를 켰다. 아내가 보는 과학채널에 고정되어 있던 TV는 오늘 낮 시간 내내 이어졌던 종교단체 과격집회에 대해서 방영하는 중이었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수백명의 인파가 피켓을 들고 사람 사진이며 지구본 모형 따위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들이 불태우는 것들 중에 하얀 색 우주왕복선 모형이 포함되어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내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구호를 외쳤다. ‘디스커버리-에덴 호 발사 결사반대’ 내가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니라면, 아내는 아마도 저 우주선에 탑승하기 위해 집을 나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사실이 틀림없다면 내 아내는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100년 이상 지구를 비우게 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저 우주선의 목적지는 지구로부터 100년 거리에 있는 행성이었으니까. 음, 왕복하는 시간을 고려하자면 200년쯤 되는 건가?
기분이 나쁘다.
“야, 이런 걸 알았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어… 미안하다. 어젯밤에 너무 퍼마셔서 지금 막 정신을 차렸거든. 상황을 보아 하니 너도 지금 일어난 것 같구만 뭐. 그런데 뭐야, 정말 너만 떼어 놓고 가버린 거야? 애는 어쩌고?”
“씨발… 나도 모르겠다. 얘기나 더 해 줘봐. 승무원 등록된 사람들은 죄다 소환한 거야? 그럼 지금 플로리다에 가 있겠네?”
“글쎄다. 나도 지금 뉴스 보고 놀라서 전화한 거라 그렇게 자세한 것 까지야… 야, 그런데 너가 가지 말라고 했다면서. 가고 싶으면 자기랑 장모님이랑 애들까지 다 끌고 가라고.”
“그럼, 가지 말라고 했지. 너 같으면 마누라가 200년 동안 지구를 비운다는데 그래, 잘 가세요, 냉장고에 반찬은 떨어지지 않게 채워주시구요, 하고 말겠냐?”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어젯밤에 봤을 때는 그런 얘기 없었잖아?”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전화기를 넘어 날아온 퍼즐 조각 하나가 끊긴 필름 사이에 철컥 소리를 내며 안착한 기분이었다.
“어젯밤에 우리 마누라를 봤다고?"
“그래… 뭐야, 너 기억 안 나냐?”
“아씨… 몰라, 자세히 좀 얘기해 봐. 내가 부른 거야?”
“니가 불렀지, 그럼. 술 많이 먹어서 운전 못할 것 같다고 전화 걸었잖아.”
녀석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3차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대리운전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전화를 받은 아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내가 전화통을 붙들고 무슨 소리를 지껄였을지 상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마 결혼을 앞둔 커플에게는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만한 대화가 오고갔을 것이다. 이상한 건, 그런 통화를 마치고 나서도 아내가 별다른 불평 없이 내 곁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친구들은 매번 그랬듯, 내 아내가 나타나자 더 이상 진상을 부리지 못하고 술자리를 끝냈다. 친구보다 돈도 잘 벌고, 가방끈도 길고, 말도 잘하는데다가 유식하기까지 한 친구의 아내란 대체로 그런 자리를 파괴하는 능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법이다. 나는 전화기 너머 녀석을 다그쳐서 아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샅샅이 알아내려고 했지만, 녀석은 담담하게 증언했다. 내 아내는 아무 말도 않고 내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너네는 내 마누라한테 나를 맡겨두고 자리를 떴다, 이거지?”
“그래.”
“옆에 다른 사람은 없었고?”
“다른 사람 누구? 술집도 문 닫기 직전이었는데?”
나는 트렁크 속의 시체 두 구에 대해서 고백을 해야 하는 건지, 아주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잠시 뒤 녀석은 자기도 술이 꼭지까지 오른 상태여서 자세히 기억은 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발뺌을 시도하고 있었다. 녀석은, 가정법원 문턱은 몰라도 검찰청 문턱을 오르내리게 하기엔 너무나 믿음직스럽지 못해 보였다. 나는 녀석을 적당히 안심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한참을 멍하니, TV만 바라보고 있었다. TV는 한 달 후 발사대에 오르는 디스커버리-에덴 호에 관한 이야기를 신나게 떠벌이고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남들에겐 새로운 소식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 3년 동안 저 프로젝트의 가장 세부적인 진행사항까지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으니까.
내 아내는 나를 처음 만날 때부터 이미 나보다 충분히 잘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대한민국 항공우주원 ‘에덴’ 프로젝트의 수석 연구원이었고, 나는 각종 학술 세미나를 기웃거리며 복도에서 마주치는 교수님들에게 인사드리기 바빴던 늦깎이 대학원생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부산까지 내려가 참석한 세미나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나는 그저 단 하루가 되어도 좋으니 이 여자랑 사귈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는 여한이 없을 거란 식의 즐거운 상상을 했을 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평생을 함께하리란 다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아내도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고백이란 걸 했을 때, 그녀는 깔깔대며 이렇게 말했으니까. “하여튼 인간들이란…” 그것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내 첫 번째 도끼질은 그렇게 실패했다.
하지만 스무 번쯤 찍었을 때 나무는 기어코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루터기가 꺾인 나무는 시간이 흐르자 아예 뿌리가 뽑힌 채 나에게로 쓰러졌고,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어떻게든 지탱해 보려고 애썼지만,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분수에 넘치는 짐이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자면, 지난 3년간 우리의 결혼생활을 지탱해 온 것은 나보다는 내 아내에 가까웠다. 박사과정을 간신히 마치고도 지방 대학 강사 자리 하나 얻지 못해 쩔쩔매는 나에게 쓸 만한 직장을 몇 군데 추천해 준 것도, 알량한 자존심에 그 직장들을 하나하나 때려치우고 나와 기어코 칩거생활에 들어간 나에게 이따금씩 일거리를 제공해 준 것도, 끼니마다 밥을 짓고 국을 끓여 텅 빈 집에서 허탈한 아침을 맞이하는 나를 채워준 것도, 내가 아닌 내 아내였으니까. 나는 아내를 미치도록 사랑해야만 한다고 틈이 날 때마다 되뇌었다. 하지만 이 고고한 다짐이 오히려 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다. 왕자와 평범한 여자는 사랑할 수 있어도 공주와 평범한 남자는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내가 정말로 알 수 없었던 세상의 굳건한 법칙이다.
어쨌든 우리 사이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만든 것은 그녀가 결혼 전부터 참여하고 있던 디스커버리-에덴 호 발사 프로젝트였다. 내가 알고 있는 프로젝트의 개요는 단순했다. 지구로부터 100년 거리에 있는 푸른 행성에 인간을 보내 탐사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탑승자 전원은 동면상태에 들어간 채로 100년 후 ‘에덴’ 행성에서 깨어나며, 그곳이 제 2의 지구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는지 판별하게 된다. 프로젝트의 초기, 그러니까 내가 아내와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승무원들은 배우자와 자식을 비롯해 ‘정서적 안정감에 도움이 되는’ 지구인 2명씩을 우주선에 탑승시킬 수 있었다. 나는 오로지 그 약속 하나만을 믿고 그녀와 결혼했다. 어쩌면 내가 쉽사리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은 머지않아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게 되리라는 꿈에 너무나 부풀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아내는, 우울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내 꿈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다. “우리 같이 못가겠다.” 아내는 오늘에야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우리의 이별은 어쩌면 그 날 저녁에 이미 통보된 것이나 다름없을 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아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어 처가 번호를 누르고는, 그 번호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장모님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이혼서류를 만들어 도장까지 찍고 사라진 마당에, 아이를 맡기면서 아무런 언질도 건네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장모님이 아직까지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걸까.
한참을 생각했지만 결론은 명백했다. 오늘 밤이 아니라면, 나는 어쩌면 영원히 내 아이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통화연결음이 먹먹하게 흐르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제발, 장모님이 아닌 내 아이가 전화를 받기만을 바랐다.
“김서방인가?”
젠장.
“아… 네, 장모님. 안녕하셨어요?”
“안녕하기는 개뿔. 괜찮은가 자네?”
워낙 바보 같은 말로 통화를 시작했던 탓일까. 따스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 공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냐는 말 한마디에 그만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울먹이는 소리가 들릴까봐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내 손이 혹시라도 튀어나올지 모르는 말실수를 막아주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그래, 지금은 꼭 필요한 말만 해야 한다.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그냥 아이만 바꿔달라고 하는 거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나 같은 아버지는 없는 게 좋을 것 같다거나, 하찮은 남편보다는 인류의 미래가 달린 일을 선택한 아내의 결정에 동감한다는 말 따위는 해서는 안 되는 거다. 더 못난 모습 보이지 말고 조용히 사라지자. 조용히, 그러니까…
“자네한테 할 말이 있는데. 지금 혹시 차 트렁크에 이상한 거 있지 않나?”
정수리에 망치가 떨어진 기분이었다.
“…네?”
“내가 아침에 자네 마누라한테 들은 말이 있어서 하는 소리야… 아직 처리 못했지, 그거?”
그거, 그거라. 아무리 사람이었다지만 지금은 숨이 끊어졌으니 ‘그거’ 라고 부르는 게 이상할 건 없는데. 그래도 보통은 시체를 저렇게 부르지는 않잖아? 나는 아내가 장모님에게 무슨 소릴 한 건지, 그래서 장모님이 알고 싶은 건 뭔지, 아니 그보다 경찰에 신고해 버린 건 아닌지… 너무도 궁금한 탓에 그만 내 아이가 거기 잘 있느냐는 질문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고작 한 대답이란 것도,
“라면… 말씀이신가요?”
따위일 수밖에.
“라면 말고. 라면은 해장하려고 샀다면서? 아직 처리 못했구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이걸 먼저 전화를 걸어봐야 하나- 그냥 기다릴까- 고민했는데 기다리길 잘 한 것 같구먼.”
“아, 저, 죄송한데, 지금 말씀하시는 그게 뭔지 제가 잘…”
“시체 말이야, 시체. 두 사람이지? 걱정 말게. 자네가 죽인 거 아니니까.”
이걸 위로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보다 지금 내가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장모님이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장모님은 나와 대판 싸운 아내가 울면서 전화로 하소연 할 때에도 늘 껄껄대며 남자란 다 바깥 사정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냥 꾹 참으라는 식으로 대처하는 여장부이긴 했지만, 사람이 둘이나 죽어서 사위 자동차 트렁크에 쑤셔 박혀 있다는데 이딴 식으로 낄낄댈 사람은 아니다. 아니… 아닐 것 같다. 그보다는 아니길 바란다. 내 장모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다.
“겁먹은 꼴을 보니 경찰에도 신고는 못했겠구먼? 자네 마누라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니까. 내가 일 잘못되기 전에 당장 가서 치워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그러더라구. 일단 술을 그 지경으로 퍼마셨으니까 초저녁까지는 아무것도 못할 테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경찰에 신고할 위인은 못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아… 네. 그렇군요…”
“내가 성격상 재촉하는 걸 싫어하거든. 그래서 굳이 전화도 안 해보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지. 일단 썩기 전에 자동차 끌고 우리 집으로 오게. 저녁도 굶었을 텐데 와서 갈비라도 좀 뜯으라고. 자네 마누라가 자네 먹으라고 사다 놓은 거야.”
“…갈비요?”
“걱정 말어. 자동차에 썩은 냄새 배기 전에는 처리해 줄 테니까. 아, 동현이는 여기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동현아, 아빠 전화다-”
이건 뭐야, 하는 순간 전화기 너머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순간 나는 유괴범들이 왜 흉악범으로 취급되며, 전화로 아이 목소리를 들은 부모들이 왜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장모님과의 통화로 미루어 보건대, 지금 처갓집은 어쩐지 안전한 장소라고 할 수 없어 보였다. 나는 소파를 박차고 일어서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 질렀다. 동현아. 아빠가 갈게. 조금만 기다려! 오랜만에 고기를 뜯고 있는 탓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을 깔깔대며 더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턱에 받친 채로 침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옷을 꺼내 입었다. 머릿속으로는 그간 아내와 처가의 행적들이 빠른 그림으로 스쳐가고 있었다. 폭력조직인가? 장모님은 보스고? 그래, 그러고 보면 뭔가 이상하긴 했어. 장인어른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고, 장모님이 가진 재산이라곤 시 외곽에 있는 조그만 빌딩 하나가 전분데, 그거 하나로 딸년 유학도 보내고 영재교육도 시키고 결혼하니까 번듯한 집도 마련해 줄 수 있었다고? 이제야 모든 실마리가 잡히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지구를 비우면서, 나에게 살인누명을 씌워 내 인생을 박살낼 계획이었던 거다. 그러다가 막상 아이를 보니까 안쓰러웠겠지. 아이를 장모님에게 맡기면서 아내는 담담하게 말했을 것이다. 어차피 경찰에 신고도 못 할 위인이니까, 정신 차리거든 불러다가 적당히 처리해 주세요. 뭐, 잘 먹고 잘사는 꼴은 백년 거리가 아니라 백 만년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두고 볼 수 없으니까 그냥 적당히 먹고 살게만 해 주시고요. 장모님은 킬킬대며 대답했겠지. 애가 볼모로 있으니까 뭔 짓이든 함부로는 못 할 거다. 아아, 치졸한 복수극 같으니라고!
주차장으로 뛰어나가 차 문을 열 무렵 장모님이 다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장모님. 제가 갑니다. 동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 뒤에 일은 책임 질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자네 그게 무슨… 까지만 듣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온 몸의 분노를 가득 담아 차에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 집어던져 버린 핸드폰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처가였다. 무시하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려다가, 전화를 받아 냅다 소리 질렀다. “장모님이 무슨 수작 부리는 건지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대로 당하고 있진 않을 겁니다!” 그대로 닫아버린 핸드폰을 다시 조수석에 집어던지고,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어두컴컴한 차창 너머로 동현이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일단 동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우선이다. 보통 영화 줄거리가 그렇잖아. 일단은 인질을 구해내고, 그 과정에서 악당의 함정에 빠지지만, 결국 죽을 고비만 몇 번 넘기고 나면 정의는 승리하고 모든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생각하고 보니 ‘죽을 고비 몇 번’ 이 좀 걸리긴 했지만, 아이를 구해낼 수만 있다면 그깟 죽을 고비쯤은 얼마든지 넘겨도 좋았다.
하지만 다시 조수석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차를 갓길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지막한 엔진소리가 가릉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핸드폰을 들어 한참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전화를 받고 나면 일이 또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일단 이 전화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누르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미쳤어?”
아내였다.
다시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해야 할 말을 아주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어디야? 전화는 왜 꺼놨어?”
“여기 미국이야. 비행기 타고 있었어. 이륙할 때만 꺼 놓는다는 걸 깜빡했네.”
“진짜로 간 거야? 그 디스커버린가 뭔가 하는 우주선 타러?”
“얘기해 봐야 보내주지도 않았을 거잖아. 그렇게 막 없어져 버린 건 미안한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무슨 사정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남편이랑 자식을 그렇게 내팽개치고 도망간 거야? 지구를 떠난다더니, 아주 지구를 버리려고 작정한 거야?”
“그런 거 아냐! 자기가 어젯밤에 말실수 한 것 땜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억에 없는 사실로 말싸움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아내가 날 떠났다는 사실보다 몇 배는 중요한 사건이 터진 참이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장모님한테 얘기 듣고 전화한 거야?”
“그래. 자기, 엄마한테 무슨 소릴 한 거야?”
“왜. 정곡을 찔리니까 당황한 모양이지? 어디까지 계획을 세워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착각하지 마. 나 그렇게 쉬운 놈 아냐. 동현이만 구해 내고 나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계획?”
이런 식이다. 더는 참을 수가 없다.
“나한테 살인 누명을 씌우려고 했잖아, 이 더러운 년아!”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들려왔다. 태평양 건너 수천 킬로미터의 공간이 그대로 압축돼 전파를 타고 귀에 쑤셔 박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아내를 버텨보려고 노력했던 지난 세월의 아득함이, 그 아찔한 무게감이, 찰나에 불과한 침묵에 고스란히 실린 채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를 온전히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도저히 이 어마어마한 침묵도 깰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무력하게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는 웃었다.
깔깔대고 낄낄대며 한참을 웃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해지는 웃음이었다. 그녀가 지구를 떠나고 지구가 그녀를 잊어버린 지 200년쯤 지나더라도 우주 어딘가의 전화통에서는 반드시 흘러나오고 있을 것만 같은 웃음. 그것은 우리가 오늘 이별했고 그보다 훨씬 전에 이별을 약속했으며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리는 웃음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겪었던 온갖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고작 이 웃음소리 몇 초로 위안 받고 있는 내가 너무나 싫어서, 나는 기분이 나빴지만, 또 기분이 좋았다.
웃음의 끝에 그녀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하여튼 인간들이란…”
뭐랄까, 그 웃음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나는 이야기를 더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는 부정할 수 없이 나보다 훨씬 큰 존재였다. 200년 뒤의 지구를 다시 만날 것이며, 200만년 뒤에 새로운 인간들이 머물 새로운 지구를 준비하는 그녀는, 아마도 내가 깨지 못한 술기운에 짐작하거나 죽을 고비 몇 번으로 깨부술 수 있는 계획보다는 훨씬 원대한 무언가를 예비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내는 장모님한테 모든 걸 맡겨뒀으니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라고만 했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간 것을 거듭 사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동현이를 사랑하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나는 얌전한 벙어리처럼 그 모든 말을 듣고만 있다가 전화를 끊었다. 얼마 있다가 장모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장모님은 내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으며 아내는 무엇을 부탁했는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다만 이전보다 훨씬 침착한 태도로 집이 아닌, 집 근처에 있는 시 외곽 야산의 공원으로 오라고만 말했다.
장모님은 커다란 삽 두 개, 그리고 기름이 담긴 것처럼 보이는 물통 하나와 함께 어둠이 내린 공원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려 꾸벅 고개를 숙이자, 장모님은 아무 말도 없이 손짓으로만 트렁크를 가리켰다. 이윽고 활짝 열린 트렁크에 고개를 파묻은 장모님이 도대체 뭘 살피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열 걸음쯤 바깥에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던 나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눈동자를 부릅뜨며 짧게 물었을 뿐이다.
“어제 봤던 사람들 맞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장모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 두 구를 들쳐 매고는 야산 깊숙이 들어가 구덩이를 팠다. 허약한 남자와 노인 둘이 해 내기엔 힘에 벅찰 거라고 예상했는데, 장모님은 거의 사람이 낼 수 없을 정도의 괴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혼자서 시체 두 구를 매고 성큼성큼 앞서 간 장모님은 헐떡거리며 뒤쫓아 간 나에게 삽을 받아 무시무시한 속도로 구덩이를 파 들어갔다. 사지 멀쩡한 사위가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길어야 십 분 남짓한 시간동안 시체 두 구가 가지런히 누울 수 있을 만한 구덩이가 완성되고, 장모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더니 그 위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나에게 말을 건넨 건 탁탁 소리를 내며 손을 털더니 뒷춤에서 담배를 꺼낼 때가 되어서였다. 한대 피겠나? 나는 나도 모르게 손 사레를 쳤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장모님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더니 첫 연기를 내뱉음과 동시에 구덩이로 담배를 던져버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화끈한 열기가 얼굴을 휘감았다.
“아는 사람들인가?”
“아뇨. 어제 처음 만났습…”
“난 아는데.”
기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아이는 잘 있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을 참이었다.
“자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거, 잘 듣고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게.”
“예… 예?”
“원래는 나도 얘기해 줄 생각은 없었는데, 자네 마누라가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에는 자네도 뭔가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더라고. 하지만 계율을 깨는 건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이야. 그러니까 세세한 일까지는 기억할 필요는 없어. 그냥 자네 마누라가 자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것만 새겨두면 돼.”
장모님은 뒷춤을 뒤져 다시 담배를 꺼냈다.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늦게 일어난 탓에 기분이 나빴다. 그래, 그게 문제였던 거다. 기분이 나빴던 탓에 아침에, 아니 점심에 일어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동현이를 세 번이나 울리고 밥도 제대로 못 먹였던 거다. 아내가 우리 가족을 떠난 지 한 달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혼자서는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 느지막이 일어나 봐야 식탁 위에 남겨진 메모도, 핸드폰에 담긴 문자도 없이 혼자서 밥을 짓고 반찬을 꺼내 상을 차리는 생활이 얼마나 길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장모님과 함께 생활한 며칠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 집에서 계속 살아가기란, 정신이 살짝 이상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모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문 밖까지 나서 배웅하면서도 영 못미더워 하는 눈치였지만 별 수가 없었다. 아내가 합숙소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장모님에게 신신당부했던 단 한 가지는 다름 아닌 나의 안전과 행복, 그것뿐이었으니까.
동현이와 나는 어제 플로리다에 도착했다. 우리는 에덴 프로젝트 팀의 배려 덕택에, 승무원의 가족 자격으로 디스커버리-에덴 호의 발사광경을 지켜볼 수 있도록 초대권을 발급받았던 것이다. 우편으로 도착한 초대권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나는 지체 없이 장모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장모님은 호탕하게 동행을 거절했다.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은 윗선의 허락 없이는 살고 있는 땅에서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내 아내는 뭐냐고 질문하자, 장모님은 그런 건 이미 다 이야기해 줬다며 알아서 짐작하라고 말해버렸다. 짐작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 아내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우주로 떠나는 영웅이며, 모자란 남편 때문에 도망치듯 지구를 떠나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남편을 배려할 줄 아는 헌신적인 아내인데다가, 지구를 떠나는 최초의 뱀파이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을 정말 사랑한 나머지 결혼하고 애까지 낳아버린 최초의 뱀파이어이기도 할 것이다.
뱀파이어 중에서도 극소수에 속하는 데이-워커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이용해 지구를 지배하는 대신, 인간이 각고의 노력 끝에 발견해 낸 제 2의 지구를 완전한 뱀파이어의 제국으로 만들고자 한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인간들이 그렇듯 장모님도 자기보다 윗선에 있는 작자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고 말했으니까. 다만 확실한 것은, 내 아내는 다름 아닌 그 고위 뱀파이어라는 작자들에게 굉장한 특별대우를 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다만 그녀가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계율을 어기고 나에게 이런 비밀들을 누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게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씁쓸해해야 할 일인지는 아마도 보다 먼 훗날에 확실해 질 것 같다. 나는 장모님의 집에서 탈출했지만 비밀을 알게 된 그 날 이후로 내가 항상 감시받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헌터들로부터 나를 수호하며, 한편으로는 한마디라도 입을 잘못 놀리는 순간 가차 없는 보복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길거리에 몰려나와 우주선 발사를 반대하던 종교단체들은 평범한 인간으로 위장한 헌터들이라고, 장모님은 설명했다. 그들은 길거리에 몰려나올 때마다 ‘에덴은 신이 인간에게 약속한 낙원이며, 인간들이 그 땅을 밟는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는 식의 씨알도 먹히지 않을 논리를 내세우곤 했다. 하지만 속내로는 디스커버리-에덴 호의 발사를 어떻게든 지연시키는 한편, 그곳에 탑승할 준비를 해 나가고 있는 ‘어떤’ 뱀파이어를 색출해서 제거하는 데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어떤’ 뱀파이어에게 접근하기 위해 징검다리로 삼기에 가장 쉬웠던 상대가 다름 아닌 그녀의 모자란 남편이었다는 건 누구나 상상하기 쉬운 일이다. 나는 멋도 모르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뒤 계획적으로 내게 접근한 그네들에게 다름 아닌 내 마누라가 저 우주선에 탄다고, 남편도 버리고 애도 버리고 지구도 버린 채 어딘지도 모를 우주를 향해 떠나가는 천하의 썩을 년이 내 아내라고, 그래서 나는 정말 기분이 나쁘고 또 나쁘다고 하소연했던 모양이다. 헌터들을 알아보고 몸을 숨겼던 아내는 어디선가 내가 말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지체 없이 그들을 사살했다. 아마 그날 밤 아내가 정체를 드러내고 계율을 어긴 채 인간을 사살하는 모험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나는 다음 날 내 집이 아닌, 이상한 지하실 따위에서 고문을 받으며 눈을 떴을 일이다. 그게 다 내 아내가 날 버릴 수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 그러니까 다른 건 다 잊어먹더라도 아내의 진심은 오해하지 말라고, 장모님은 내게 누누이 타일렀다.
동현이와 나는 발사대가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마련된 가족석에서도 제일 앞줄을 배당받았다.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에 내 아내가 탄 우주선, 디스커버리-에덴 호가 세워져 있었다. 이미 동면에 들어간 승무원들의 얼굴은 볼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오면서도 내가 눈물을 흘리거나 벅찬 감동에 말을 잇지 못하는 꼴을 보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내 눈앞에 세워진 아내의 마지막 위용을 확인하고 나니, 가슴 한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먹먹한 감정으로 매몰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야 아내의 본모습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다가설 수도 없고,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늦게 일어난 탓이다. 그래서 아침도 못 먹고 여기까지 오는 차도 거의 놓치기 직전에 잡아 탄 탓에, 그 와중에 울어대던 아이를 제대로 달래지도 못한 탓에, 그래서 기분이 나쁜 것이다. 영원히 지구를 떠나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로 자리할 아내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게 아니다. 그녀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내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니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내 옆자리에 앉은 채 창밖의 발사대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빠, 저거 로케트야? 나는 멍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보처럼 대답했다. 응. 저거 지금 쏘는 거야? 응. 지금 들리는 소리가 영어로 숫자 세는 거거든. 0까지 세고 나면 발사할거야. 우와! 저거 진짜 쏘는 거야? 그래. 지금 30까지 셌네. 아빠가 쏠 때 가르쳐 줄까? 응! 그런데 아빠,
“저기 누가 타고 있어?”
말문이 막혔다. 나는 아이의 양 어깨를 꼭 잡았다. 장모님은 비밀을 알게 되는 건 오로지 나 까지만 허용이 됐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동현이는, 평생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니 어쩌면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얼핏 잔인한 것 같은 그것 역시 아내의 바람이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길 바란다고,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다시 전화통화를 했을 때 그녀는 내게 직접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갈등했다. 사실을 말해 줘야 하나. 어차피 무슨 말인지도 모를 텐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한국말을 알 것 같지는 않은데.
너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 너희 엄마가 저기 타고 있고, 다들 동면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대기권을 벗어나면 혼자 유유히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며, 100년간 우주의 온갖 위험들을 피해 다닐 수준은 못되는 자동조정 장치를 보조하는 일을 할 것이고, 결국 새로운 세상에도 홀로 발을 딛게 될 거라고. 다른 승무원들은 죄다 너희 엄마를 위한 먹이일 뿐이고, 인간의 목에 직접 입을 대는 걸 싫어하는 데이-워커인 너희 엄마를 위해 얌전히 온몸의 피를 몸밖에 내어놓고 얼어붙은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이니, 결국 저 거대한 우주선은 너희 엄마만을 위해 준비된 식탁, 어쩌면 냉장고, 어쩌면 희망을 대가로 인간을 농락한 것을 기념하는 악취미적인 기념물일 뿐이라고 말하면…
나는 동현이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우주선의 첫 번째 단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앞의 유리창이 세차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주선에 눈을 맞춘 채로 말했다.
“아무도 없어.”
동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도?”
“응, 아무도.”
우주선이 움직였다. 꽁무니에서 뿜어진 화염이 물결처럼 지상을 휘감고, 어마어마한 연기와 먼지구름이 족히 수십 미터는 치솟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터져버릴 것처럼 떨려오는 유리창에 양 손을 얹고, 얼굴을 가까이 대어 뿌옇게 가려진 시야 너머를 바라보려고 했다. 우주선이 떠오르는 모습은 거짓말 같았다. 지구의 손아귀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하늘로 치솟는 우주선 자신도 자신의 모습을 믿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힘든 거짓말처럼 떠나간 것이, 앞으로 200년간은 지구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니, 슬프지 않다. 유리창의 진동이 전해진 탓이다. 그리고 늦게 일어나서 기분이 나쁜 탓이다. 나는 담담하게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다. 그녀는 나 없이도 100년 동안의 고독 정도는 가뿐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서… 누군가를 오롯이 배려하면서도 돌아오는 사랑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서. 그러니 내가 슬퍼할 필요는 없다. 내가 울어줄 필요도 없다. 내가 사랑할 필요도 없다. 그냥 소심하더라도 마지막 인사 정도만 건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다른 손을 하늘로 향해 흔들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안녕, 내 사랑.”
(2010.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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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집에 돌아와 가방을 열어보고 나서야 어젯밤 어머니가 챙겨주었던 팔백육십육만오천삼백이십일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표 네장에, 현금은 칠십칠만원이었다. 주머니에서 어머니가 적어준 메모를 뒤늦게 찾아내고, 거기 꼼꼼하게 적힌 수표 및 현금 액수, 계좌번호와 은행 이름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사태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썅년같으니. 부르튼 입술을 부르르 떨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사실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남자가 집을 방문한 것은 꼭 석달만이었다. 어머니는 나뭇잎에 물이 오를 때 집을 나가 낙엽이 떨어질 때에야 돌아와서는 대뜸 따뜻한 저녁밥을 요구하는 아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심부름을 맡겼다. 이번 달 곗돈을 무통장 입금시켜 달라는 간단한 부탁이었다. 남자는 나름 두툼한 현금과 수표뭉치를 받아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엄마는 내가 이 돈 갖고 날라버리면 어쩔 낀데? 아들이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내며 던진 농담에 어머니는 웃지도 않고,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심한 태도로 과도를 놀려 사과를 깎으며 대답했다. 죽여버릴끼다. 사과즙이 묻어 형광등 아래 찐뜩하게 빛나던 칼날과, 언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EBS 따위에서 봤던 소금평원의 갈라진 등짝처럼 짜게 굳어버린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남자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집을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more..
- 저기…
- 암 소리 말고 찌그러져 있거레이. 잡소리 지껄였다간 죽여버릴끼니깐.
그래서 아버지는, 정말 아무 말도, 심지어 어머니가 아닌 아들에게조차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사과 세 개를 삼키고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새장가는 가야 하는데, 죽기는 싫었겠지. 남자는 그 날을 회상하며 홀로 되뇌곤 했다. 남자가 생각하기에 화룡점정은 어머니의 끝마무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에 대고 거인의 목소리로 호령했던 것이다. 어디가나! 간만에 왔는데 저녁은 안 먹을끼가?
남자는 어머니의 쿨한 이별방식을 존경했고 자신에게도 불가피하게 이별이 닥치게 된다면 꼭 저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하필이면 오늘 낮에 현금 팔백육십육만원이 든 가방과 함께 그런 상황을 마주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침 일곱 시에 별안간 전화를 걸어 곤히 잠든 남자를 깨우고는 지금 시외버스에 탔다고 선언한 그녀는, 오전 열시 반이 되자 다시 전화를 걸어 터미널에 도착했으니 마중을 나오라고 말했다. 남자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씻지도 않은 채로 추리링 차림에 돈이 든 가방만 걸쳐 메고 집을 나서 택시를 잡았다. 갑자기 연락도 끊어버리고 집으로 내려가 버려야만 했던 핑계거리론 마땅히 써먹을 게 없어서, 그는 그저 최대한 대범하고 담담하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남자한텐 가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한 거야.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은 변한 게 아니니까 조금만 이해하고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오빠 믿지? 월세 낼 돈이 없어서 친구 집에 얹혀살다가 친구가 룸메이트를 구하는 바람에 떨려났다는 이야기는 목에 과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꺼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 말은 남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낯선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여자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고, 남자는 그러자고 했으며, 여자는 카페로 들어가 길거리가 잘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고, 남자는 엉거주춤 그 옆자리에 앉으려다가 여자와 같이 나타난 낯선 남자가 먼저 그 자리에 앉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앞자리에 앉았으며, 여자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남자는 같은 걸 달라고 했으며, 여자는 오랫동안 침묵했고, 남자는 오랫동안 숨죽였다. 무심히 사과를 깎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그 침묵이 필연적인 막바지를 향해 무르익을 때였다. 어머니의 얼굴과, 사과를 깎던 손놀림과, 눅눅하게 젖어가던 과도 모두가 검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칼끝에서 예리하게 빛나던 섬광만 검은 실루엣 끝에서 이글이글 빛났다. 그는 가방을 열어 사과 대신 지갑을 꺼냈다. 과도 대신 계산서를 집어든 그는 계산할 액수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 계산은 내가 할게.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는 침을 삼켰다. 허튼 소리 했다간 주… 그러니까 그,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몰라. 최대한 큰 걸음으로 계산대로 걸어가 계산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길가로 나와 택시를 잡아 탄 후에야 자신이 팔백육십육만원이 들어 있는 가방을 카페에 두고, 달랑 지갑만 들고 카페를 뛰쳐나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허겁지겁 택시를 돌려 카페로 돌아가면서도, 아니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 카페 문을 열기 직전까지도 남자는 혹시라도 돈을 잃어버릴 거란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왜 '죽여버리겠다' 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했는지, 혹시라도 그녀가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너무 늦어버렸지만 이제라도 '죽여버리겠다' 고 말해줘야 하는 건지, 너무 늦은 고백을 준비하는 스무 살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카페 종업원은 맡아둔 물건을 찾아주듯 익숙한 태도로 남자에게 가방을 건넸다. 남자는 자꾸만 기분 나쁘게 미소 짓는 종업원이 꼭 뭔가 알고 있는 것만 같았지만, 차마 '죽여버리겠다' 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면쩍게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났다. 은행을 먼저 들르는 게 순서였지만, 남자는 어째서인지 집으로 가고 싶었다. 반짝거리는 과도를 들고 쿨하게 이별과 분노를 합치시켜 죽음이란 단어로 소통할 줄 아는 어머니에게 돌아가서 그 삶의 비기를 전수받고 싶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어머니는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서 집에 없었다. 대신 남자를 맞이한 것은 자신의 것과 똑같이 생겼지만 다른 사람의 것임이 분명한 가방과, 자신이 방금 팔백육십육만오천이백삼십일원을 잃어버렸다는- 지극히 쿨한 사실 뿐이었다.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실로 존재론적인 고민 끝에 남자는 여자를 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개썅년이 꼭두 아침부터 잡것을 몰고 이 촌구석까지 쳐들어오는 일만 없었어도, 남자 역시 멀쩡한 곗돈을 길바닥에 처박고 올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니까. 남자는 목이 쉬고 땀이 흐르도록 혼자 방방 뛰며 여자를 욕하다가, 결국 핸드폰을 들어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 변경에 따라 자동 연결 서비스로 연결됩니다. 본 서비스는 한 달간 제공되며, 이후에는…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대충 짐작케 하는 안내가 이어진 뒤, 거의 영원과도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쩌지? 굳이 번호까지 바꿔버렸는데 내 전화를 받아 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참, 혹시라도 전화를 받으면 어쩌지? 죽여버리겠다는 말부터 해야 하나? 아니면 돈은 어쨌냐는 말부터 해야 하나? 설마 돈을 가지고 튄 건 아닐테고, 가방은 카페에 맡겨뒀을 테니까 행방은 모를텐데. 그럼 나는 도대체 왜 전화를 걸고 있는 거야? 둔탁한 고민들이 바다안개처럼 머릿속을 휘감았다. 이상한 순간이었다. 남자는 헤어진 연인들이 대체로 그런 순간들을 이겨내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많은 이들이 현금 팔백육십만원을 잃어버리는 사건과 이별을 동시에 겪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해야 하는 걸까? 이해해 준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데 이해해 준다면 뭘 이해해 줘야 하는 거지? 철컥,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 돈 내놔.
여자는 황당하다는 듯 대답했다. 뭐? 내 돈, 아니 우리 엄마 돈 팔백육십육만원, 내놓으라고 이 썅년아. 뭐라고? 팔백육십육만원! 우리 엄마 곗돈 팔백육십육만오천이백삼십일원! 너 땜에 잃어버렸어! 무슨 소리야. 커피 값 얘기하는 거야 지금? 아니, 그거 말고, 내 가방에 있던 우리 엄마 곗돈!
다행히 여자는 침착하게 사태를 정리할 줄 알았다. 남자를 달래가며 자초지종을 파악한 그녀는 남자 못지않게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오빠 바보야? 그런 거면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해야지 왜 나한테 해! 빨리 카페에도 연락해 보고 바뀐 가방 안에 연락처 같은 건 없는지 확인해 보란 말을 남기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멍하니 끊긴 전화통을 바라보던 남자는 껍질 벗겨진 사과처럼 방 한구석에 내동댕이쳐진 가방을 발견하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락처, 연락처라고?
사정없이 파헤쳐져 지퍼가 뜯어지도록 허연 속살을 벌리고 있는 가방 주변에는, 책 몇 권과, 엠피쓰리플레이어, 오르골처럼 보이는 작은 상자 하나, 그리고 낡은 가죽지갑 하나가 있었다. 아마 돈뭉치를 찾으려고 자신이 정신없이 꺼내 던진 물건들인 것 같았다. 남자는 허겁지겁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확인했다. 보통 주민등록증이 들어가기 마련인 지갑의 투명한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신용카드 두 개, 교통카드 하나, 만원자리 다섯 장과, 10달러 지폐 여섯 장, 그리고 몇 번 접힌 종이가 지폐를 넣는 칸에 함께 들어가 있었다. 남자는 종이를 꺼내 내용을 살펴보고서야 지갑의 주인을 알아낼 수 있었는데, 이런 썅, 그의 이름은 (어떻게 읽는 지도 알 수 없는) Sheridon Delorean M, 종이의 정체는 국제운전면허증이었다. 면허증에는 그의 사진도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증명사진인 주제에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고 있는 백인의 허여멀건 한 얼굴이 대체 왜 그렇게 얄미워 보였는지, 남자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다가 어젯밤 번뜩이던 어머니의 과도를 떠올리고 나서야 간신히 참아냈다. 경찰에 신고할 차례였다.
경찰은 무덤덤했다. 기다리세요. 자신을 강순경이라고 밝힌 전화 상대방은 주말 저녁시간 독촉전화를 받은 중국음식점 주방장처럼 대답했다. 저, 언제까지 찾아주실 수 있는데요? 글쎄요. 외국인 신원조회는 시간이 좀 걸려서 확답은 드리기 어렵습니다. 가방에 여권은 없다고 하셨죠? 네. 제가 급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빨리 좀 안될까요? 글쎄요. 저희도 빨리 찾아드리면 좋죠. 그럼 언제쯤으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글쎄요. 일단 접수는 됐으니까 기다려 보세요. 저, 있잖아요. 남자는 잔뜩 울먹이는 목젖을 삼손의 힘으로 찍어 누르며 말했다.
- 저 엄마한테 죽을지도 몰라요.
강순경은 헛기침을 섞어가며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드릴 테니까 일단 기다리세요. 남자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 헛기침이 웃음을 참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었는지 의심했지만,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돈만 찾아준다면.
기다림은 십분 만에 초조함으로 가득 매워졌다.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는 오르골을 열어 보았다. 조그마한 세 개의 플라스틱 구체에 불이 들어오더니 서로를 빙글빙글 돌며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제목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퍽이나 재미없고 몽롱한 음악이었다. 노란 색 불이 들어온, 크기가 가장 큰 구체는 가운데에 정지해 있었고, 그의 삼분의 일쯤 되어 보이는 구체는 푸른빛을 내며 제일 외곽에서 노란 구체를 돌고 있었고, 크기가 가장 작은 구체는 갈색 빛을 내며 푸른 구체를 돌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태양, 지구, 달을 형상화한 물건 같았다. 남자는 나름대로 정교하게 재현된 우주의 신비를 한동안 멍한 기분으로 감상했다. 음악이 멈추자 세 구체는 노랑, 갈색, 파랑 순으로 일직선에 선 채로 정지했다. 일식이잖아. 남자는 중얼거리며 오르골을 닫았다.
돈을 찾아냈단 전화는 오래도록 걸려오지 않았다. 남자는 불안하고 또 불안해하다가 컴퓨터를 잡았다. 인터넷에 접속하니 한 달 뒤에 한반도 전역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을 거란 기사가 떠 있었다. 남자는 달그림자에 삼켜져 버린 태양의 사진들과, 검은 원 가장자리에서 날카롭게 타오르는 하얀 색 불꽃들을 바라보며 과즙이 묻은 어머니의 과도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숨겨놓은 쿨한 삶의 비결이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고.
어머니의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이었다. 경찰은 가방 주인이 경찰에 수소문을 해 왔으니, 두 분이 직접 만나서 일을 해결하는 게 좋겠다며, 연락처를 알려두었다. 다행히 한국말을 잘 한다는 말도 잊어버리지 않고 덧붙였다. 남자는 메모해 놓은 번호로 지체 없이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을 원상 복귀시켜 놔야 했으니, 시간이 없었다. 통화 연결음이 두세 번쯤 흐르고, 수화기에선 듣기평가 테이프에서나 듣던 원어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Hello? 남자는 머릿속을 더듬어가며 할 말을 정리했다.
저… 혹시 쉐리던 돌로렌 씨 맞으신가요? What? 쉐... 리던 돌로렌 엠, 씨 맞으시냐구요. 아, 제카 Sheridon 입니타만, 무쓴 일이시죠?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오늘 아침에 카페에서 가방 잃어버린 적 없으세요? 카방? Oh, my... 탕쉰이 제 카방을 가지고 있나요? 아 네. 가방이 서로 바뀐 것 같은데, 쉐리던씨도...
제 팔백육십, 아니 우리 어머니 곗돈 팔백육십육만오천삼백이십일원을 무사히 간직하고 계시나요? 란 말을 미처 꺼내기 전에, 상대방은 다급한 목소리로 남자의 말을 끊었다.
- Orgel, Orgel은 잘 있나요?
네? 그 카방 안에 Orgel… 오르골같은 게 있써쓸텐데, 그게 찰 있냐구요. 아 예… 뭐 내용물은 다 무사한데요. Orgel도 있타는 커죠? 네. 오르골 맞죠? 오르골. 오르골 있어요. 그거 혹쒸 열어 퐜나요? 아까 전에… 심심해서 잠깐 열어보긴 했는데… 노래를 킅카지 들었어요? 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지할 때까지 듣긴 했어요. Oh, Jesus… 아니 그보다 쉐리던씨, 제 가방은… 잠칸만요. 치금 이 천화, 일반 천화에요? 제 핸드폰인데요. Cellphone? Yours? …네. 셀폰. 제 셀폰인데요. Damn it! 우리 통하 시작한 지 얼뫄나 됐죠? 글쎄요, 정확히는… 제 말 잘 들으쎄요. 머지않아 누군가 찾아카거나, 천화를 걸 텐데, 절때로 그 사람둘한테 오르골을 건네줘선 안뙈요. 무슨 뚯인지 알켔죠? …뭐라구요? Shit! 통하가 너무 낄었어요. 제가 다쉬 전하할 테니까 초큼만 기다려요. 네? 쉐리던씨? 여보세요?
쉐리던인지 Sheridon 인지, 어쨌든 상대방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자는 자신이 뭔가 좋지 않은 일에 연관된 것 같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아무튼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곗돈 팔백육십육만오천이백삼십일원이 안전한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럴 때는 어떡해야 하는 거지? 다시 걸겠다는 전화는 도통 걸려 오질 않았고, 남자는 전화만 붙들고 집안을 순회하듯 서성이다가 다시 경찰에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막 통화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오르골을 가지고 있나?
상대방의 목소리는 꽤나 묵직한 저음이었는데, 발음으로 보아하니 한국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까 전화를 받았던 쉐리던 같지도 않았다. 퍽이나 기분 나쁜 존재감이 풍경화의 여백처럼 목소리의 여운을 매우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려 가며 대답했다. 누구시죠? 쉐리던 씨 대신 전화하신 거예요?
- 묻는 말에나 대답해. 오르골을 가지고 있나?
어쩐지 주눅 드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무슨 오르골을 말씀하시는 건지… 니가 가지고 있는 오르골 말이다. 쉐리던이랑 통화한 건 다 들었으니까 혹시라도 발뺌할 생각은 말아라. 다 듣다니, 그럼 지금 도청을 했다는 건가요?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했다. 남자는 용기를 냈다. 싫은데요. 아저씨나 자기가 누군지 밝혀 보시죠? 경고한다. 뒷일은 책임지지 않겠다.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아저씨나 뒷일 걱정하시는 게 좋을 걸요? 내 돈 내놔요, 내 돈!
남자는 악에 받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그게 ‘내 돈’ 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의외로 묵직한 저음의 상대방은 목소리 만큼이나 그 말을 무게 있게 듣는 것 같았다. 시간이 아주 잠깐 흐르고 나서, 상대방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 쉐리던에게 속은 건가?
네? 쉐리던이 얼마를 주기로 한 거지? 아… 예, 뭐, 주기로 한 건 아니지만… 말 해. 그러니까 도합 팔백육십육만오천이백삼십일원이에요. 일원짜리까지 들어간 건 이게 은행 이자가 붙은돈이라 그런 거거든요? 은행이라. 비밀계좌로 넣어주기로 한 건가? 비밀계좌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럼 현금으로? 네. 현금으로 줘야죠. 아니 참, 수표도 넉 장 있었어요. 현금은 총 칠십칠만원인데, 오만원짜리가…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그 돈, 우리가 주도록 하지. 오르골을 넘겨주겠나?
남자는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쉐리던은 건네주지 말라고 그랬는데. 지금 어머니의 곗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쉐리던이었고, 쉐리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가방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 원한다면 더 얹어 줄 수도 있다.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남자는 다시 마주한 실로 존재론적인 고민 앞에서 한참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뭔가 멋지고 쿨하고 남자다운, 그러니까 어머니의 ‘죽여버리겠다’ 는 선언만큼이나 깨끗한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지만, 생각나는 말들이라곤 온통 찌질한 향기를 물씬 풍기는 말들뿐이었다. 죄송한데, 그 돈이 제 꺼가 아니라, 엄마한테 물어봐야 되는데요… 라고 하기도, 누구신지도 모르는 분하고 그런 약속을 하기가 좀 어려워서… 라고 하기도, 경찰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잠시 뒤에 다시 전화해 주시면… 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 앞에서, 헐떡대는 남자를 구원해 준 건 결국 답답해진 것 같은 상대방이었다. 상대방은 예의 여운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잠시 뒤에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돈은 달러로 준비할 테니까 미리 계산해 놔. 아, 그리고… 경찰한테 연락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뒷일은 알아서 수습하는 게 좋을 거다.
네. 라고 얌전하게 대답하고 나자 통화는 중단되었다. 남자는 뭘 어찌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혼자서 결정할 단계를 넘어갔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벽시계로 시선을 돌리니 어머니가 돌아올 시간은 대략 삼십 분 정도가 남은 것 같았다. 경찰에는 연락하면 안 된다고 했고, 가장 현명한 방법은 역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보는 것이었지만, 어머니의 번뜩이던 과도와 어두운 표정을 떠올리고 나니 도무지 통화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에게 상담해 보자니, 돈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그 가방을 잃어버린 이유란 게 여자 친구가 잡놈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고, 여자 친구랑 그 잡놈 앞에서 최대한 쿨하게 보이고 싶어서였다, 라는 사연을 주절대며 늘어놓아야 했다.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결국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피곤한 음색으로 전화를 받았다.
- 왜 또. 가방 못 찾았어?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봐. 가방을 가져간 사람이랑 연락이 되긴 했는데, 그게 외국 사람이야. 그런데 이 사람이 내 가방은 잘 가지고 있는지 말도 안 해주고, 대뜸 자기 가방에 들어있던 오르골은 잘 있는지부터 물어보는 거야. 오르골? 응, 오르골. 가방 안에 오르골이 하나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이걸 열어서 연주하는 것까지 들어봤다고 하니까, 갑자기 오 마이 지저스가 어쩌구 그러더니 전화를 끊어버리더라. 그런데 쫌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전화가 와서, 오르골을 넘겨주면 우리 어머니 곗돈에 웃돈까지 얹어서 달러로 주겠다고 그랬거든. 그런데 쉐리던은 다른 사람한테 오르골을 넘겨주면 안 된다고 했고… 쉐리던이 누군데? 내 가방 가져간 사람. 가방 가져간 사람이 오르골은 딴 사람한테 주지 말라고 했어? 응. 그 오르골이 뭐 중요한 물건 인가봐. 경찰에도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해서 너한테 전화했어. 나 어떡하니? 그걸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 오빠. 우리 헤어진 거야.
그걸 내가 모르겠니. 알지! 당연히 알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나랑 너밖에 없단 말야. 아무리,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달리 물어 볼 사람이 없어. 옛 정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좀 도와주라. 지금 내가 너무… 너무 당황돼서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어. 돈은 찾아야 되는데, 이상한 일에 얽힌 것도 같고, 다신 안 그럴게. 다시 그럴 수나 있겠냐? 말마따나, 헤어졌는데? 한 번만 도와줘. 너 침착하잖아? 아까 전화했을 때에도 니가 침착하게 가르쳐 줘서 여기까지 잘 풀렸단 말야. 좀 도와줘!
그녀의 반응은 간단했다.
- 전화 끊어도 돼?
안 돼! 너 자꾸 이럴 거야? 우리가 어디 오다가다 만난 사이야? 그래도 벌써 일 년, 아니, 아직 일 년은 안됐던가? 아무튼 일 년이 다 되도록 애인이었잖아. 헤어지는 마당에, 그래도 이 정도 부탁쯤은 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좋아, 이해해 달란 말은 하지 않을게. 귀찮게 술 먹고 전화하거나 괜히 땡깡 부리는 일도 없을 거야. 너 그놈이랑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도록 충분히 기도하고 빌어줄 테니까, 한 번만 도와주라. 응?
다행히 여자는 침착하게 사태를 정리할 줄 알았다. 지금 여기서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다면 남자가 한참동안은 더 귀찮게 굴 거라고 판단한 그녀는, 남자를 달래서 다시 한 번 자초지종을 파악한 후에 남자의 어머니만큼이나 짜게 식어버린 말투로 대답했다. 경찰에 신고해. 남자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경… 찰에는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어쩔 건데? 그냥 거기서 혼자 어버버 거리다가 가방도 못 찾고, 오르골인가 뭔가도 뺐길 거야? 어차피 오빠,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잖아. 경찰한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해. 이런저런 일이 있고, 지금 신변에 위협도 가해지고 있으니까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그럼 도와줄까? 그런 일 하라고 경찰이 있는 거야. 이 정도면 됐지? 그래… 고마워. 그럼 전화 끊을게. 아냐, 잠깐만,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너 혹시…
- 팔백육십육만오천삼백이십일원, 을 달러로 환전하면 얼마나 되는지 알아?
여자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지만, 남자가 다시한번 물어보자, 잠시 뒤에 칠천육백달러 정도 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남자는 고맙다고 말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그는 여자가 시킨 대로, 바로 경찰에 연락해서 신변보호를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인터넷을 열어 환전표를 확인해 본 뒤에, 팔천달러를 요구하면 자신이 얼마나 이득을 보게 되는 건지, 사백 달러를 더 가져다준다면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실지, 그 기쁨이 한 계절 동안 깊게 번진 어머니 얼굴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을 만한 것인지, 아니, 그보다는 너무 많은 돈을 보탰다가는 어머니가 불필요한 의심을 하는 건 아닌지, 뭐 그런 일 따위를 곰곰이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쉐리던에게 재차 전화가 걸려왔을 때, 그의 목소리만 확인한 뒤에 짤막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말하자면 모종의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바늘이 그 나름대로의 마지노선을 넘는 순간, 남자는 당장이라도 초인종 소리가 울릴 것 같은 기분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문득 핸드폰 진동 소리가 초조함을 깨트렸다. 그는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생각은 끝났나. 경찰에 신고한 건 아니겠지.
팔천달러, 팔천달러 준비하세요. 그거면 충분한가? 충분하니까 걱정 말고 오시라구요. 엄마 퇴근하기 전에 와야 되니까 얼른 서둘러요. 여기 주소는… 위치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쉐리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네, 네. 아무 말도 안하고 끊었으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오기나 하세요. 혹시라도 엄마보다 늦게 오시면, 아니다, 엄마 오자마자 바로 경찰서로 달려갈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있으시구요! 왜 어머니가 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지? 그거, 엄마 돈이란 말이에요! 제가 이러는 거 알았다간 저 엄마한테 죽어요! …알겠다. 서두르지.
남자는 다시 초조하게 현관 앞을 서성거렸다. 베란다로 나가서 혹시 낯선 차가 주차장에 들어오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가로운 평일 초저녁, 흐릿하게 번지는 석양빛에 동네는 먼 곳부터 녹아들고 있었다. 잔뜩 흐느적거리는 촌구석의 저녁은 낯선 풍경이라곤 그 누구에게도 흘리지 않기로 작정한 것만 같았다. 퇴근시간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승용차들이 느린 속도로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와 멈추고, 비슷비슷한 복장을 한 남자, 혹은 여자들이 차에서 내려 저마다 짐을 챙겨 제 갈길로 사라졌다. 남자는 베란다에 서서 손톱을 깨물며 그렇게 먼 곳과 가까운 곳에 주차되는 모든 차들을 초조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파트 멀리 보이는 길에서 촛농처럼 떨어진 붉은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오토바이이며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색 슈트를 입은 사람이 그 위에 타고 있다는 걸 확인했을 때, 남자는 어쩐지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오토바이가 남자의 아파트 입구에 와서 멈추는 걸 확인한 남자는 현관으로 달려와 슬리퍼를 신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남자는 결국 아파트 통로 중간 쯤에서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사람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짧은 단발머리의 동양인 여자였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여자는 남자를 지나쳤고, 남자는 그녀가 둘러 맨 가방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문득 투시력이라도 얻은 것처럼 그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현금 팔천 달러를 본 것만 같은 확신을 받았다. 남자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 잠깐만요. 오르골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여자는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봤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남자에게는 그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 여자를 앞지른 남자는 거침없이 소리쳤다. 따라와요! 남자는 순식간에 집 안에까지 뛰어 들어가고는 바닥에 놓여 있던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여자는 현관 문간에 서서 숨을 몰아쉬며, 남자를,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가 들고 있는 오르골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찾으시는 게 이거 맞죠? 남자는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시키려고 했는데, 여자가 손을 내밀며 소리 질렀다. 열지 마! 남자는 손을 멈칫했고, 여자는 현관문을 닫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어머니는?
아직 퇴근 전이에요. 오실 때 다 됐으니까 늦기 전에 빨리 돈부터 내놔요.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거 맞죠? 급하니까 얼른! 여자는 아직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방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남자의 채근이 한 번 더 이어지자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먼저 한 가지만 묻겠다. 네가 ‘어머니’ 라고 부르는 존재는 도대체 누구냐?
남자의 얼굴이 당혹감에 젖어들었다. 어머니가 누구냐고요? 그래. 어머니가 어머니지 누구긴 누구에요. 이 집 주인이시고, 당신이 가져온 그 돈 주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에요. 한국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계’ 라고 알아요? 계? 계가 뭐지? 아니 그러니까…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돈부터 줘요. 우리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지 누구긴 누구에요. 별 이상한 소릴 다 듣겠네. 미안하지만… 여자는 왼손으로 어깨에 들쳐 맨 가방을 꽉 움켜쥐고는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설마. 남자가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여자는 이미 오른손에 든 권총으로 남자를 조준하고 있었다. 남자는 기겁하며 자리에 주저앉아 뒷걸음질 쳤다.
- 자세히 설명해 주기 전에는 거래할 수 없다.
미치겠네. 가 시작이었다. 남자의 머릿속에 품은 말이 가감 없이 입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순간, 여자는 총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공이치기를 잡아 당겼다. 탄창이 회전하며 남자가 이제껏 들어온 어떤 소리보다 차가운 쇳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남자는 갑자기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머릿속에 표백제를 뿌린 것처럼, 온통 희뿌연 공간 안에 어머니의 곗돈을 왼손에 든 채로 자신에게 리볼버를 겨냥하고 있는 낯선 외국 여자의 잔상만이 어지럽게 하늘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장미십자단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냐? 글쎄요.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꽃은 안개꽃이구요, 교회는 부활절이랑 크리스마스에만 나가는 데요. 꽃 중에는 안개꽃이 제일 싸고, 부활절이랑 크리스마스에는 교회에서 먹을 걸 주거든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었다간 답례로 총알이 날아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보였다. 정말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쏟아졌다. 남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여자 앞에서 울어 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외국 사람이니까 이런 일이 익숙할지도 몰라. 남자의 눈물 정도는 쿨하게 넘겨줄 줄 아는 여자를 만난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잘 진행되던 일이 이따위로 틀어진 이유가 고작 ‘계’ 라는 단어 때문이라는 점에 생각이 도달하면 다시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복잡한 감정들은 남자의 눈물샘을 하염없이 자극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가 안 돼 보였는지 다소 누그러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어머니’ 의 정체를 밝히는 게 혼자서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다른 사람과 상의해도 좋다. 다만 빨리 하는 게 좋을 거다.
상의, 상의라. 상의 좋지. 기껏 구해 놓은 조언에 따르지 않은 덕택에 이따위 일도 당하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자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사람이라곤 딱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남자는 고민했다. 다시 전화하면, 그런 나를 이해해 줄까. 이별한 바로 그 날에 전화를 세 통이나 거는 사람은 없잖아. 하지만 이별한 바로 그 날에 낯선 여자가 머리통에 총을 겨누는 일을 당한 사람도 없겠지. 특별한 일은 특별하게 이해해야 하는 거라고. 사람에게는 사람 나름의 일들이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단순히 옛 애인이 아니라 그냥 헤어지고도 잘 지내는 친구 사이로, 그냥 조금 독특한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 사이로 지낼 수도 있는 거야. 그런 건데… 그럴 수 있을까? 남자가 고민하는 사이 여자는 눈동자만 돌려서 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어.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군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오르골을 책상 위에 두고, 핸드폰을 들고 나와서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연결음이 흐르는 내내 이마에서 끈적한 진땀이 배어나왔다. 여자는 참 착하게도, 다시 전화를 받아주었다.
- 왜 자꾸 이래.
미안해. 미안한데, 지금 한 가지만 더 도와줬으면 해서. 아까 내 말 뭘로 들었어? 나도 오빠랑 좋은 관계 유지하면 좋겠지만, 오늘은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아까 내가 네 말대로 경찰에 전화를 하지 않고 돈을 더 주겠다고 한 사람을 불렀거든. 뭐라고? 니가 칠천육백달러라고 해서 내가 팔천달러 불렀단 말야. 아, 진짜… 그런데? 그런데 그 남자가 안 오고 웬 외국 여자가 왔어. 내가 오르골은 건네줄 테니까 돈부터 내놓으라고 했더니, 이 여자가 갑자기 우리 엄마가 누구냐고 물어보거든. 어머니가 누구냐고? 그래. ‘어머니’ 가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 해 주지 않으면 돈을 줄 수가 없대. 이제 어떡하지? 지금 그 여자랑 같이 있는 거야? 응. 지금 우리 집 현관에 서 있어. 신발도 안 벗었어. 뭐야. 그런 걸 왜 물어보는데? 나도 몰라. 그냥 궁금한가 보지. 내가 전화 받으면서 이 돈이 사실 내 돈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 곗돈이라고 얘기했거든. 그런데 이 사람이 외국 사람이라 ‘계’ 가 뭔지 몰라. 아니 그게 아니라,
- 왜 그런 걸 자꾸 나한테 물어보냐고.
아까 말했잖아. 너밖에 불어볼 사람이 없다고. 이 바보야, 그런 건 좀 혼자서 결정해! 아니면 어머니한테 물어보던가! 야, 너 자꾸 이럴 거야? 이 사람이 혼자 결정하기 어려우면 다른 사람이랑 상의해도 좋다고 했단 말야! 아, 진짜. 그냥 이름 말해주면 되잖아! 누구누구 여사님 되십니다. 아니, 구체적인 게 궁금하면 구체적인 걸 구체적으로 물어보라고 해! 그런 질문이 아니라니까! 우리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그러니까,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뭐 그런 걸 물어보는 거라고. 미치겠네, 진짜. 오빠,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거니? 나 지금 장난칠 기분 아냐. 니가 여기 와서 이 여자 표정을 봤어야 돼. 한끝이라도 실수했다가는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 같이… 웃기고 자빠졌네. 멀쩡한 장정이 여자 하나 못 이겨서 죽냐? 왜, 그 여자가 총이라도 겨누고 있는 거야? 그래, 이 썅년아!
- 지금 총 겨누고 있단 말야, 총!
여자의 눈썹 끝이 살짝 꿈틀거린 것 같았다. 남자는 홧김에 소리 지르고 나서도 자신이 뭔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건 확실히 인지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영원 같은 순간이 총알 대신 심장을 관통했다. 남자의 귓가에 들린 것은 전화기 너머에 있는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는 소리와, 적막한 집 안을 삽시간에 뒤흔든 문고리 덜컥 거리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진 초인종 소리뿐이었다. 남자는 지옥의 문이 열리는 신호를 들은 기분으로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끊고, 어느 새 고개를 돌린 채 이를 악물고 있는 여자를 지나, 현관문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누구세요?
- 애미다. 문 열어.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여자가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었다. 당황한 그녀는 권총을 허리춤에 숨기고 현관 한쪽으로 바싹 붙은 채 들어오는 어머니를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마른 침을 삼키며 두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저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맞이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아무튼 저 여자는 권총을 들었고, 여기서 모든 걸 폭로했다가는 어머니나 자신이나 살아남는 것부터가 문제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검정 타이즈를 입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문간에 서 있는 그녀를 흡사 투명인간 보듯이 지나쳐 버렸다. 남자는 현관 밖으로 한 걸음 비키며 말했다. 오…셨어요? 늦으셨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기엔 다소 좁은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신발을 벗게 되자, 그제야 인상을 찌푸리며 여자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다시 아들을 바라보며 짤막하게 물었다.
- 누기냐?
소… 손님, 손님. 전해 받을 물건이 있어서 잠깐 오시라고 했거든. 그, 금방 갈 거니까 엄마는 신경 안 쓰고 있어도 돼. 손님이라꼬? 여자친구 아니꼬? 아… 아냐! 그런 거. 엄마는 얼른 방에 들어가 있어. 내가 마중하면 되니까. 애이고, 손님이라꼬 오셨는데 암껏도 안 내놓고 집안 꼴은 이게 다 뭔데? 뭔 가방을 이래 다 싸질러 놨노? 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니깐! 됐다. 들어오시라 캐라. 저녁 묵을 시간 다 됐는데 따순 밥이라도 한 술 뜨셔야재. 내가 니 왔다고 해서 이래 장도 봐왔다 안카나. 글쎄, 그럴 거 없다니까! 야가 참말로… 손님대접 그리 푸되게 하면 괜히 동티난데이. 신발도 안 벗고 있는 거 봐라. 어려워 말고 어여
- 들어오이소.
이런저런 말들을 흘리며 부엌까지 들어가 전등불을 켠 어머니는 현관에 선 여자를 향해 사뿐히 손짓했다. 전등을 등지고 선 어머니의 얼굴엔 시커먼 그림자가 서렸고, 흔들리는 손등만 반짝거리고 있어서, 아들과 여자는 어머니의 표정은커녕 손끝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딱딱하게 굳은 여자의 얼굴은 어머니의 검은 얼굴에 고정된 채로, 보이지 않지만 혹시나 읽힐 지도 모르는 어떤 비밀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어머니의 손짓을 무시한 채 신발끈조차 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대범하게 뒤돌아서서 그림자 속에 완전히 모습을 가려버렸다. 여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당신이 ‘어머니’ 입니까?
어머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퉁이를 뚜벅뚜벅 돌아서며 한 마디를 대답처럼 흘렸을 뿐이다.
- 내가 야 어머니는 맞는데, 와 들어오지는 않고 그런 걸 물어보능교?
여자는 계속해서 물었다. 당신이 이곳 지부를 관리하는 사람입니까? 관리? 통장 아지매 찾아왔는가배. 옆 동 301호라예. 여자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그게 아니라… 당신이 ‘계’ 를 관장합니까? 계라꼬? 무신 계를 묻는지 모르겠네. 내가 혼자 살면서 이래저래 큰 돈 들어갈 일이 많아서 여기저기 계는 쫌 많이 하고 있는데. 와. 계 들라꼬?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가방을 현관 앞에 내려놓더니, 신발을 벗어놓고 집안으로 들어가며 당당하게 말했다. 샹그릴라에서 왔습니다.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들 중에 샹그 뭐라고 하는 게 있긴 한지 머릿속을 검색하는 중일 것이다. 모든 게 오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남자는 이 기묘한 상황을 대체 어찌해야 하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 오르골을 노리다가 쉐리던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왜 그 오르골을 노리시는 겁니까? 어머니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여자는 이를 악물고는 부엌의 전등을 향해 한 걸음 걸어가면서 다시 말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전권을 위임받고 이 나라에 파견된 겁니다. 제 경고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제야 어머니는 부엌 전등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사과와 과도를 쟁반에 담은 채로. 빛을 받은 어머니의 얼굴이 조금 찌푸린 무표정으로 하얗게 드러나고, 쟁반 위에선 과도의 맑은 칼날이 형광등 빛을 받아 폭발할 듯이 빛나고 있었다.
- 무신 말잉교?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두 알 것만 같았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바보라도 뭔가 잘못된다는 걸 알아차려야 정상이니까. 여자는 어머니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잔뜩 힘이 빠진 발걸음으로 남자에게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오르골을 내 놔.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에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더듬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오르골을 들고 나와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힘 빠진 손으로 오르골을 받은 여자는 신발을 다시 신으면서, 턱 끝으로 현관에 내려놓은 가방을 가리켰다. 거실에 자리를 잡고 사과를 깎고 있던 어머니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 가능교?
여자는 대답하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와, 늦었는데 밥이라도 한 술… 어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는 혼자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가방을 열어 본 남자는 그 안에 백 달러짜리 뭉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확인했고, 차마 그걸 어머니 앞에서 확인할 용기가 없었던 탓에 가방을 들고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서 어머니가 소리 질렀다. 니 또 밥도 안 묵고 게임이나 쳐 할라고 그러재! 남자는 이를 악물고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면서 마주 소리쳤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지폐는 팔십 장. 팔천달러가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남자는 과연 일이 잘 풀리긴 한 건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문득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데 불났는갑다. 뭔 소리 들리지 않나?
남자는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것이 소방차 사이렌과는 미묘하게 다른 소리라는 걸 눈치 챘으며,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현관으로 튀어나와 문을 잠근 후에 베란다로 뛰어갔다. 검게 물들어가는 저녁을 짙은 색으로 밝히며, 경찰차 여섯 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집 앞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 오빠. 괜찮은 거야?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남자는 담배연기와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네가 신고했다면서? 그럼, 그딴 소리만 하고 연락이 끊겼는데 내가 안심이 되니? 미안해. 오늘은 내가 하루 종일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같아. 진짜, 웬일이니… 돈은 잘 찾은 거고? 응. 원래 가방으로 되찾았어. 쉐리… 하여튼 그 사람한테는 진짜 미안하다고 했더니, 다친 사람 없이 잘 풀렸으니까 괜찮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그 오르골은 뭐래? 비싼 거야? 나도 몰라. 물어봤더니 알 것 없다고 그러던데. 그래도 뭐 들은 말이라도 있을 거 아냐. 정 궁금하면 한 달 쯤 지나서 하늘을 유심히 보라고 그러더라. 내가 뭔 짓을 했는지 알게 될 거라고. 뭐야, 그게 전부야? 나도 궁금해서 인터넷 뒤져봤더니, 한 달 뒤에 우리나라 전역에 일식이 있을 거라고 그러더라? 나 혹시, 일식을 부르는 오르골이라던가, 뭐 그런 거라도 손에 넣었던 건가? 신기하기는 한데, 별로 돈 될 물건은 아니겠네. 그렇지? 쓸모도 없고. 경찰에서도 계속 수사할 거라니까, 뭔가 정보가 나오면 알려 주겠지.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은경아, 우리…
- 오빠. 잊지 마. 우리 헤어진 거야.
여자는 앞질러 못박았다. 하긴, 그 정도 상황판단만으로 경찰을 부를 정도로 눈치가 빠른 사람인데, 이 정도 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그래서 남자는, 그렇구나. 알았어. 미안해. 다시 만날 순 있는 걸까? 라는 말 대신,
- 일식 시작되면… 같이 구경할래?
라고 말했다.
(201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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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인은 선서하세요.
- 네.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증인, 이현경.
- 원고측은 심문 시작 하세요.
- 알겠습니다. 간단한 사실관계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2006년 3월 17일 펴낸 논문에서 최면을 통해서 사람에게 본인이 원하는 꿈을 꾸게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한 바가 있지요?
- 최면만으로 불가능합니다. 최면치료와 함께 몇 가지 약물처방 및 심리 상담을 병행해서 원하는 때에 원하는 꿈을 꾸게끔 유도하는 방식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상실험 결과를 함께 수록했으니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시 실험 성공률도 90% 내외로 측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 논문의 요점은 사람들이 원하는 꿈을 꾸게끔 유도하는 게 아니었다, 이 말씀이신가요?
- 네. 정확히 ‘그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 알겠습니다. 증인의 이론은 같은 해 7월 1일 발간된 논문을 통해서 반박당한 바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 알고 있습니다. 같은 연구실에서 일하던… 동료가 제 방식을 이용하여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친 결과를 수록한 논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검사님, 그건…
- 바로 그 논문에 수록된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에 의하면 증인이 개발한 방식의 성공률, 즉 피 실험자들이 사전에 작성했던 내용과 같은 꿈을 꾼 비율은 3% 내외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후 연장된 실험기간동안 비슷한 구도의 꿈을 꾼 사람까지 모두 더하더라도 성공률은 20% 미만입니다. 증인, 증인은 이 실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more..
- 네. 증인은 사전 답변을 통해 당시 행해진 블라인드 테스트는 실험실 동료의 악감정에 근거해서 조작된 실험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악감정의 원인은 당시 연구비 책정과 관련된 학계 내 알력다툼이라고 말씀하셨구요. 그렇다면 피고는 당시 블라인드 테스트의 대상이었던 피 실험자의 상당수가 실험진에 의해 매수된 상태였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 그렇습니다. 사실 원하는 꿈을 꾸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점은 객관적으로 입증하기가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피 실험자가 수면 상태에 들어간 동안 뇌파를 측정해서 반복 비교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이미 그 정도 자료는 제 논문에도 수록되어 있구요. 그렇지만 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난 뒤에 피 실험자가 거짓말을 한다면 그걸 밝혀낼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의 내용 자체가 매우 신기한 것인 만큼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한 사람은 있겠죠. 반박논문에 기록 되어 있는 3% 내외의 성공률이 그걸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 입증할 방법이 있나요?
- …지금은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거라곤, 저는 제가 애초에 펴 낸 논문에 수록된 성공률, 그러니까 적어도 90% 내외의 성공률은 제 양심을 걸고 자신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 좋습니다. 증인은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2008년 봄부터 사람들에게 ‘꿈을 파는’ 사업, 즉 원하는 꿈을 꾸게 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맞습니까?
- 아닙니다. 제 실험결과는 완전히 부정당한 상태였고, 따라서 저는 제 이름을 걸고 일정한 금액을 받으며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2008년 봄에 저를 찾아온 사람은 제 주변인들로부터 소문을 전해 듣고 자진해서 방문한 사람이었습니다. 수고비로 받은 돈도 처음부터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치료가 끝난 후에 자진해서 건네준 돈이었고, 저는 어디까지나 치료의 대가가 아닌 수고비의 명목으로…
- 증인이 당시 수수한 돈은 현금 2천만원입니다. 수고비 명목으로 받은 돈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많지 않나요?
- 말씀드렸다시피 당시 돈을 받은 건 제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올해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제 환자들에게 돈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 아드님이 인터넷과 정보지를 통해 본인을 홍보하고, 치료의 대가로 일정한 금액을 암묵적으로 정해 놓았다는 사실도 모르셨다는 거죠?
- 그렇습니다. 어미로써 할 말은 아니지만, 제 아들을 증인으로 세운다면 그 점에 대해선 확실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아드님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은 작년 여름에 이 사업에 대해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고, 그 진행방향과 재실험 여부에 대해서도 충분한 상의를 거쳤다고 하는데요?
- …제 아들이요?
- 네.
-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로…
- 증인.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면 위증죄가 적용됩니다. 알고 계시죠?
- 하지만 저는 정말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제 아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증인의 주장에 따르면 피고는 자신이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지난 2년간 총 21명의 환자에게 원하는 꿈을 꾸게끔 하는 시술을 행하고, 수고비 명목으로 2억원 상당의 현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환자들 중 상당수는 심각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피고, 피고는 자신의 시술이 유발할 부작용에 대해선 고려하신 적이 없습니까?
- 제 시술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저를 찾아온 환자의 대다수가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원하는 꿈을 꾸는 대가로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돈을 선뜻 지불하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욕구불만으로 반쯤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꿈을 통해 욕구가 해소될 길을 열어주고, 약물 처방과 상담을 통해서 치료를 해 보고자 노력했습니다만… 당시 제 신분은 정식 치료기관에 소속된 의사도 아니었고, 저를 찾아온 사람들도 원하는 꿈을 꾸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있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원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본인의 책임은 없다는 건가요?
- 책임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 그 사람들이 보이는 정신질환의 원인 전부를 제 시술로 떠넘기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접근입니다.
- 알겠습니다. 판사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2009년 12월 22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서부 경찰서 면회실>
- 그럼 시작해 볼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현경씨, 김기준씨를 처음 만난 건 언제입니까?
- 올해 5월이었어요.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아드님이 제출한 접수명부에 따르면 당시 날짜는 2009년 5월 5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기준씨를 처음 만났던 상황이나, 당시 김기준씨의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저는 점심을 먹고 서재에서 책을 읽던 중이었는데, 아들이 문을 두드리더니 환자가 찾아왔다고 말했어요. 김기준씨는 제 아들을 뒤따라서 서재로 들어왔는데, 그 눈빛이… 아직까지 기억이 날 정도로 초췌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는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보였다고나 할까요. 저는 그 사람을 소파에 앉히고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자기를 제 아들 친구의 친구라고 소개했어요. 꿈 때문에 꽤 오랫동안 괴로웠는데, 소문을 듣고 제 아들 연락처를 알아서 찾아왔다고 했죠. 자기를 치료해 주기만 한다면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만, 전 분명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연을 털어놓았는데… 기준씨는 원하는 꿈을 꾸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꿈을 꾸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심리 상담을 통해서 반복되는 악몽을 치료하는 방법이야 있으니까, 저는 부드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걸 원한다면 여기가 아니라 병원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그런데 기준씨는 꽤나 완강하게 말했어요. 자기가 꾸는 건 그냥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고. 일반적인 수준의 치료로는 어림도 없다는 거였죠. 그 말하는 태도가 퍽이나 간절해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치료를 해 준 다음에 병원을 찾아가는 방법을 권하는 것이 좀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준씨는…
- 예지몽을 꾼다고 한 겁니까.
- 예. 그것도 자꾸 나쁜 쪽으로만. 꿈을 자주 꾸는 것도 아니고 많아야 한 달에 너댓번인데, 그때마다 사람이 많이 죽거나 큰 사고가 나는 꿈을 꾼다는 거에요. 그게 어김없이 들어맞는 건 물론이고. 같이 들고 온 스크랩 자료 같은 걸 펼쳐가면서 자기가 잠들 때마다 얼마나 무섭고 괴로운지 설명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병원 치료를 권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겠지만 일단은 상당히 난감했습니다.
- 난감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 음… 우선 예지몽 같은 건 과학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정말 신이 있어서 이 사람한테 그런 능력을 내려줬다면, 제가 그걸 임의로 빼앗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제가 상담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준 씨가 꿈을 꾸는 것과 사고가 발생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밝혀주는 일 정돈데, 본인이 이렇게나 확신을 하고 십수년을 괴로워하며 살아온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지죠. 치료기구나 약물도 없는 제 집에서 치료를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이게 과거의 일도 아니고 현재 진행형인 경우에는 정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조금 무책임하지만 용한 무당을 찾아가라고 해 주는 수밖에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 당시 기준 씨의 태도가 상당히 간절했거든요. 제가 치료를 거부했다가는 어디 가서 목을 매달거나, 제 목에 칼을 들이밀더라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일단은 반복되는 악몽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치료를 해 주기로 하고, 그 날 바로 첫 번째 최면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 바로 시술을 해 줘야 할 만큼 상태가 심각했던 모양이군요.
- 예. 우선은 퇴행요법으로 과거의 꿈들을 다시 불러온 다음 그것을 부정시킬 생각이었는데, 잘 진행이 되질 않았어요. 그 사람은 한 번 꿨던 꿈은 다시 꿀 수 없다고 했어요. 이미 진행이 된 예언이니까 부정할 수 없다는 거죠. 그 말하는 방식이 정말로… 이 사람의 꿈이란 것은 정말 이 사람의 심리상태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부에서 던져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기억되는 방식도, 다시 떠올리는 방식도,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서 읽는 것처럼 아예 격리된 사실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거죠. 그러니 절대로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기준씨 자신이 스스로 괴로움을 겪었던 나날 만큼이나 길고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어요. 저는 일단 기준씨를 돌려보내면서, 소견서 정도는 써 줄 수 있으니 되도록 병원에 찾아가서 전문적인 상담을 받는 편이 좋겠다고 충고했죠. 그 무렵에는 이미, 이전에 저를 찾아왔던 환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엇비슷한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었거든요. 시술을 해 줄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 시술을 해 줄 수도 있었다, 는 것은 이후에 기준씨에게 적용한 치료방식을 이미 당시에도 떠올렸다는 말씀이시군요.
- 네. 뭐, 평범한 사고방식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에요. 한 가지 꿈을 꾸지 않게 하려면, 아예 모든 꿈자리를 정해진 꿈으로 뒤덮어 버리면 되는 거죠. 다만 이런 경우라면 환자의 정신상태에 어마어마한 과부하가 걸리게 되는 게 불 보듯 뻔 한 일이거든요. 더구나 그 성공률이 100%에 수렴한다고 자신하지도 못해요. 그건 제 방식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구요.
- 그 방식에 대해서 여쭤 봐도 될까요?
- 음… 사람은 하룻밤에도 엄청나게 많은 꿈을 꿔요. 알고 계시죠? 그 중 특별히 강렬했던 몇 가지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뿐이죠. 그 많은 꿈들이 전통적인 해석대로 꿈을 꾸는 사람의 무의식에서 발현한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 특정한 장면도 그 무의식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저는 그 사람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을 꿈속으로 불러들이는 재주는 없어요. 다만, 매일 밤 머릿속을 스치긴 하지만 기억하지는 못했던 생각들을 골라낸 다음에, 암시를 강하게 줘서 그걸 ‘꿈으로서’ 기억하게 만드는 게 제 작업이죠.
- 꿈을 만든다기 보다는 골라낼 수 있게 하는 거군요.
- 거칠게 표현한다면 그래요. 그래서 최면에 들어가기 이전에 충분한 상담을 거치는 게 중요한 거죠. 이 사람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잠재되어 있고, 어떤 부분에 자극을 주면 그게 꿈으로 깨어날 수 있겠다, 이런 설계도를 그려야 하니까요. 기준씨한테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많은 사람이 죽는 꿈, 큰 사고가 나는 꿈, 그런 걸 더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뿐이고. 결국 몇 차례 더 상담을 거치고 나서, 결론을 내렸죠. 굉장히 일상적인 꿈들, 그러니까 밥을 해 먹는다던가 친구랑 잡담을 나눈다던가 하는 꿈들을 반복적으로 심어준다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강박에서는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음모론에 심취해 있는 사람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방법 같은 거랑 비슷해요. 뭐, 장미십자단의 숨겨진 암호표라고 믿고 있던 게 알고 보니 동네 구멍가게에서 나온 찢어진 전표랑 별다를 것도 없더라, 같은 얘기 있잖아요? 최대한 엇비슷하고 일상적인 꿈을 반복 제공해서 거기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걸 일깨워 주는 거죠.
- 그렇게 치료를 시작한 게 여름부터였구요.
- 조금이나마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어요. 집 앞 식당에서 제육볶음이나 된장찌개를 사 먹는 꿈만 한 달 정도 심어준 것 같아요. 외부에서 그런 암시가 반복되어 들어오면 정신적으로 피로할 만도 한데, 기준씨는 용케도 점점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더라구요. 6월 중순부터는 꿈과 현실이 분리되어 있고, 때로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 꿈의 암시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죠.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확신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거에요.
- 무슨 의미죠?
- 제 암시를 무시하기 시작한 거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환자 머릿속에 물감이 충분해야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기준씨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아예 그런 게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6월 중순부터 조금씩 시술의 성공률이 떨어지더니, 그달 말부터는 아예 암시해 준 꿈을 꾸지 못했어요. 기준씨는 다시 불안해했죠. 그렇다고 특별한 꿈을 꾸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비어버린 꿈자리에 언제 다시 어마어마한 악몽이 닥칠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저는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기준씨가 정말 바라는 게 있어야만 내 시술도 성공할 수 있다. 항상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 내가 꿈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재료들이 부족하니까 그런 걸 이야기 해 달라. 기준씨는 한참 고민하더니 자기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꿈을 꾸게 하는 건 어떠냐고 말했죠. 전 정말 좋았어요. 헤어진 가족이나 잊을 수 없는 연인에 관한 꿈을 유도하는 건, 뭐 비교해 볼 전례도 풍부할뿐더러 실패할 확률도 극히 낮았거든요. 기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결국엔 그게 문제였어요.
- 문제였다… 는 건 어떤 말씀이신지?
- 뭐…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계시잖아요? 여기서부턴 얘기가 좀 길어지겠군요… 잠깐만 쉬었다 해요, 우리.
- 알겠습니다. 커피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2010년 2월 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지방법원, 2차 공판 현장>
- 증인은 김기준씨가 예지몽을 꾼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 음… 그건 꽤 어려운 질문인데요. 지금 어떻게 생각하냐는 건가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 어떻게 생각했냐는 건가요?
- 둘 다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 네… 처음에야, 저도 검사님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랑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더구나 저는 꿈을 연구해 온 학자였고, 남들이 아무리 신령스럽고 기이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라도 과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처음 제 앞에 선 김기준씨는 그저 악몽을 자주 꾸는 강박증 환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떠냐고 물어보신다면… 조금 자신이 없네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고.
- 좋습니다. 증인은 김기준씨를 오랫동안 상담 치료하신 바가 있지요?
- 네.
- 그렇다면 김기준씨가 자신의 오랜 고민, 즉 자신의 꿈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치료를 요청했는지 들은 바가 있습니까?
- 본인이 그 과정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적어도 부모님이나 친한 친구들한테는 이미 다 털어놓은 상태인 것 같더군요. 김기준씨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부모님께서 무당을 몇 번 찾아갔던 적이 있고, 내림굿이나 씻음굿도 몇 번 받은 적이 있답니다. 헌데 그 와중에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셨고,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이외에도 자신의 꿈과 관련된 사건들이 몇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불운이 뒤따른다고 믿은 탓인지 타인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을 상당히 꺼림칙해 했습니다.
- 하지만 저희 측 수사결과에 따르면 김기준씨의 부모님은 김기준씨가 어릴 때 이혼한 후 각자 미국 및 일본으로 이민을 떠나서 현재 무사히 살아 계시는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증인은 김기준씨를 치료할 당시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전혀 몰랐습니까?
- 확인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몰랐습니다.
- 김기준씨가 증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입증해 줄 자료가 있나요?
-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 알겠습니다. 방금 확인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사건 기록에 따르면 기준씨에 대한 치료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작년 8월 무렵에, 기준씨의 친구라고 스스로를 밝힌 강준경씨가 증인을 찾아온 바 있습니다. 맞습니까?
- 맞습니다.
- 준경씨는 기준씨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까?
- 어렸을 적부터 친구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가족사나 살아온 이야기에 대해선 제가 알고 있는 것 이외의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준경씨는 기준씨가 꿈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게다가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절 찾아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 이외의 다른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습니다.
- 준경씨도 속아왔다는 말씀이신데, 확인할 수 있습니까?
- …죽은 사람한테 어떻게 확인을 합니까?
- 증인. 흥분하지 마세요. 증인이 만났다고 주장하는 강준경씨라는 사람 하나를 제외하면, 김기준씨가 평소 친분을 맺어왔던 그 어떤 사람도 기준씨가 그렇게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들과, 당시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그리고 대학에서 친분을 맺었던 선, 후배, 교수, 조교들까지도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조금 내성적이고 때로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정신 상태를 의심할 만큼의 행동은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 이 분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증인은 스스로의 죄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기준씨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있는 건 아닙니까?
- 이 말씀은 조금 무례하시군요. 저는 보고, 들은 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 알겠습니다. 증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증인의 가정사에 대해서 짤막하게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 제 남편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 남편은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 관계가 없다고요? 경찰 진술서에 따르면 증인은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그 전날 밤에 남편의 유령을 봤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닙니까?
- 유령이 아니라 시체였습니다. 땅에 묻은 지 삼 년이나 지난 시체였어요. 비가 철철 내리는 밤에 흙탕물을 흘려가며 제 방 창문으로 기어 올라왔습니다. 그게 꿈이나 상상이 아니었다는 건 제 양심을 걸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새벽 한 시 십삼분이었습니다. 전 가위에 눌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 끔찍한 것이 침대로 기어 올라오고 나서야…
- 증인. 증인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제 아들이 봤습니다! 그 망할 자식이 꿈에서 본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난 뒤에야, 제 비명을 듣고 아들이 방문을 열었다구요! 물론 제 아들은 그런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제가 어미로서, 어미로서… 그리고 심리학자로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싶을 거에요. 어머니가 시체에게, 그것도 전 남편 시체에게 강간당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심리적 외상이에요! 시간을 두고 질문하면 분명히 결론이 나올 겁니다!
- 좋습니다. 진정하세요. 증인은 2006년, 이른바 꿈에 관한 첫 논문 발표가 있었을 무렵 같은 연구실 동료였던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남편은 이혼 후에 증인의 연구결과를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했고요. 증인은 첫 진술이나 지난 공판에서 그 ‘동료’ 가 자신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왜 밝히지 않았습니까?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 그 사람이 제 남편이었다고 밝히는 순간, 그 논문을 둘러싼 모든 더러운 음모들이 한낱 제 남편의 악감정 정도로 격하되어 버리는 게 싫었습니다. 게다가 제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었을 뿐이에요. 저 같은 아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이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반박논문이 제 남편 이름으로 발표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이건 다른 기회에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 그렇군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 …무슨 말씀이세요?
- 증인은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로, 같은 연구실 동료들에게도 결혼 사실을 숨겨가며 20년간 결혼생활을 지속했습니다. 번듯한 아드님도 있고요. 저는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아마도 연구실 생활에 사적인 제제가 가해지는 게 싫으셨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 이건 유도심문인가요?
- 그렇군요. 그렇다면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증인이 말씀하신 대로, 반박논문을 발표한 사람과 증인과의 혼인관계가 밝혀질 경우, 이 논쟁은 학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부부관계의 하나로 일축되어 버릴 수도 있었겠죠. 증인은 오히려 논문의 논쟁적인 부분을 부각시키고 학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부부관계를 숨겼던 건 아닙니까? 증인이 그 논문의 ‘논쟁적인’ 지위를 그런 방법으로 지켜낸 덕택에 2008년부터 2년간 불법의료행위를 통해 상당한 액수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시는 건가요?
- …절 모욕하시는 건가요?
- 아닙니다. 객관적인 사실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 그렇다면 제 대답도 필요 없으시겠군요? 잘나신 ‘객관적인 사실들’ 이 이미 다 가르쳐주고 있으니까? 제가 남편도 버리고, 사람들을 미쳐버리게 만들 사술(邪術)을 개발해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챙긴 다음에 급기야 본인도 미쳐버린 상태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제 남편은 죽었어요! 전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구요!
- 죽은 남편의 시체가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자신을 강간했다, 는 진술은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그건 제 남편이랑 아무 관계가 없다고! 그건 제 남편이 아니라 제 남편의 시체였을 뿐이고, 저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움직였을 뿐이에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입니다. 정말로…
- 알겠습니다. 판사님, 증인의 감정상태가 격해져서 더는 심문을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휴정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2010년 2월 9일 오후 2시, 서울 서부 경찰서 면회실>
- 이현경씨. 저한테는 진실만을 이야기해 주셔야 합니다.
- …다 사실이에요. 제 남편에 관한 것도 사실이고.
- 얼마 전에 아드님을 만나 뵙긴 했습니다만… 어째서 어머니 몰래 사업을 해 왔느냐는 질문에는 끝끝내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대충 짐작이 가긴 합니다만, 이렇게 나오신다면 제 입장도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이미 검찰측에서는 본인들에게 유리한 증거들을 많이 확보해 둔 상태입니다. 김기준씨가 정신이상자가 아니었다는 측근들의 증언이나, 김기준씨의 부모님이 사실 생존해 있는 상태란 사실은 박사님께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인 부분만 해도 이런데… 더 깊이 들어가자면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군요. 꿈을 그리려면 물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죠? 변론을 하려면 진실이 필요합니다.
- 강준경씨 말씀이신가요?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들은 바가 없어요. 죽은 사람한테 확인을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다시한번 확인하겠습니다. 강준경씨가 팔월 중순 무렵에 박사님을 찾아왔다고 하셨죠?
- 네. 광복절 직전이었어요.
- 그 때는 이미 김기준씨에 대한 치료가 상당부분 진행 중인 상태였고.
- 네. 짝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꿈을 계속해서 심어줬는데, 저한테는 그 꿈들이 현실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어요. 실제로 기준씨 강박증세도 상당히 많이 호전된 상태였고. 다만 다른 환자들처럼 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죠. 처음엔 그냥 찾아오는 꿈이었다가, 다음에는 하룻밤 자고 가는 꿈, 그 다음에는 손만 잡고 자는 꿈, 그 다음에는 섹스하는 꿈, 그 다음에는 이런 체위, 저런 체위, 뭐 요구사항은 많았지만 구체적으로 심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기준씨는 이미 제 암시를 상당히 오랫동안 받아온 터라 자체적으로 그 틀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큰 밑그림을 그려줄 뿐이었고, 구체적인 실행은 기준씨 스스로 했다고나 할까요. 이 정도면 다른 환자들보다 많이 양호한 편이었죠.
- 그런데 강준경씨가 일을 이상하게 만들었군요.
- 간신히 제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일이 다시 틀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제가 심어준 꿈들이 여태껏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는데, 게다가 그 대상이 남자였다니… 그나마 준경씨는 차분한 편이었죠. 그런 일을 두 달이 다 되도록 겪었는데 그렇게 덤덤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거에요. 결국엔 그런 덤덤함이 독이 된 것 같긴 하지만.
- 준경씨는 기준씨랑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 했죠?
- 그러니까 그 정도로 덤덤할 수 있었겠죠. 예지몽 같은 걸 꾼다는 것도 꽤 오래 전부터 알아왔다고 했어요. 정확히, 제가 그런 꿈을 심어주기 시작한 날부터 자신이 이유 없이 기준씨를 찾아가고, 이상한 행동을 하고, 심지어 거리라는 물리적 제약이 있는데도 무엇에 홀린 것처럼 기준씨를 찾아가면서도 계속 그 친구가 애초에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나봐요. 말로는 무당도 찾아가고, 심리치료도 받아봤다는데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해서…
- 본격적으로 관계를 시작한 건 언제였답니까?
- 기준씨한테 섹스에 대한 암시를 주기 시작한 게 팔월이 시작되면서 부터에요. 준경씨가 기준씨랑 첫 관계를 마치고 어마어마한 고민에 빠진 것도 그 무렵이고. 처음엔 한새벽에 잠에서 깨자마자 너무 놀라서 집으로 도망쳤다는데, 기막히게도 그 날 밤이 돼서야 기준씨 집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는 거죠. 어쩔 수 없이 찾아간 시간이 또 하필이면 자정 무렵이었고, 자기도 모르게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팔월 첫째 주가 끝나면서 기준씨가 하도 간절히 매달리는 통에 일주일쯤 되는 긴 시나리오를 심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아예 그 집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것 같아요. 여기까지 듣고 나니까 나도 황당할 수밖에요. 전부 내가 준 암시 때문이라니, 이게 내 탓인가 싶다가도 말이 되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 방금 핸드폰을 두고 와서 다시 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두 사람이 만났을 때마다 항상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있었다는 뜻인가요?
- 예… 뭐, 적어도 뜬금없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 는 식으로 만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아요. 막차가 끊겼다던가, 자취방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밤이 늦어서 주인집 아주머니를 부를 수가 없다던가, 말씀드린 것처럼 무슨 물건을 두고 왔다던가, 꼭 만날 일이 있었다던가. 애초에 기준씨가 그렇게 황당한 상황을 원하지 않았어요. 꼭 이뤄질법한 ‘현실적인’ 사건들만 심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요.
- 두 사람이 아주 친했다면, 친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렵에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연인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은…
- 글쎄요. 있었다고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그 때 준경씨는 여자 친구도 있는 상태였어요.
- …알겠습니다. 아무튼 준경씨는 자꾸 이상한 일이 반복되자 기준씨에게 확인을 했다는 거죠. 혹시 뭐 알고 있는 건 없냐고. 그러니까 기준씨는 자기가 매일 밤 꿈마다 준경씨를 본다는 걸 털어놓았다는 거고.
- 털어놓았다기보다는 자랑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이것이 운명이다’ 정도 되는 선언이었다고나 할까? 뭐 준경씨는 곧 죽어도 그따위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던 거고, 그러니까 알음알음 저를 찾아와서는, 특정한 꿈을 사람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방법은 없느냐, 라고 물었던 거에요. 뭐 결국 두 사람 다 목적은 동일했죠.
- 그런데 잘 되진 않았다는 거고.
- 준경씨가 기준씨를 어떻게 설득했느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은 없어요. 다만 며칠 뒤에 두 사람이 같이 절 찾아왔더라구요. 기준씨랑 저는 눈빛만 주고받았고, 이전에 우리가 만났던 적이 있다거나, 제가 그런 꿈을 기준씨한테 심어줬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다만 저는 정말로 제가 심었던 모든 꿈을 지워버릴 각오였고, 제 표정에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날 텐데도 기준씨는 태연하게 시술을 받더군요. 최면이 중간쯤 진행됐을 때 전 이미 알았어요. 이 사람은 이미 제 통제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말이죠.
- 기준씨가 원하는 꿈을 자유자재로 꿀 수 있게 되었다, 는 건가요?
- 적어도 제가 그려준 밑그림에 한해서는, 어떤 장면이든 마음대로 그릴 능력이 있었던 거죠. 두 사람은 이후에도 서너 번쯤 절 찾아왔고,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소용이 없었어요. 기준씨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환자가 원하는 것만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일 뿐이에요. 10월 중순에 마지막으로 절 찾아와서는, 시술이 끝나고 나서 당장이라도 꺼져버릴 것처럼 웃던 준경씨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요. 제가 치료가 잘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지갑을 열어서 여자 친구 사진을 보여주더군요. 지금은 헤어졌지만, 자기 마음속에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슬픈 일이죠.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 그게 마지막이었나요?
- 네.
<2010년 6월 17일 오후 3시. 서울 지방법원. 3차 공판>
-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김기준씨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꿈을 통해서 현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농락할 수 있는 능력이 개방된 상태였으니까요.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들어봐도 될까요?
- 제가 그려준 암시의 밑그림이 문제였습니다. 그 밑그림을 바탕으로 그 사람은 어떤 일이든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었어요. 이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죽기 직전에 어떤 꿈이든 꿔서,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모든 증거들을 말살시켜 버린 게 분명합니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다거나, 주변인들이 이상한 증언을 한다는 게 그 증거죠.
- 그렇다면 왜 가장 위험할 수 있는, 증인의 기억은 조작하지 않았을까요?
- 저는 말하자면,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개방해 준 사람이었으니까요. 저의 기억이나 능력의 어떤 부분이든 조작하고 나면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패러독스가 발생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 자체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어요. 세상의 어느 구석에서든 논리의 균열이 생기고 나면, 그건 온 세상으로 전염돼서…
- 알겠습니다. 하지만 살해된 김기준씨는 정작 자신이 가장 불쾌해하던 꿈 하나만은 마지막까지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증인의 증언에 따르자면 말이죠.
- 스스로 그 그림을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 무슨 말인지 들어봐도 될까요?
- 물론 강준경씨가 자살한 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온다는 사실이나, 퉁퉁 불어서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뿐더러 슬슬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썩어가는 시체와 매일 밤 격렬한 섹스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겠죠. 하지만 그 밑그림이 되는 사실 자체는 김기준씨가 강렬히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연인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잠들어 꿈을 꾼 후 현실을 기다려 봐야, 그 꿈이 현실로 현현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겁니다. 이 세상이 그에게 내려준 능력으로는 고작해야 죽은 시체를 일어나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던 거죠.
- 김기준씨는 살해되기 이틀 전, 증인을 찾아왔습니다. 맞습니까?
- 맞습니다.
- 증인은 그 날 밤 죽은 남편의 시체에게 강간당하는 악몽을 꿨고요.
- 꿈이 아니었습니다.
- 알겠습니다. 김기준씨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자신은 증인에 관한 꿈을 꿀 것이며, 그 내용은 죽은 남편의 시체가 찾아오는 것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까?
- 그렇습니다.
- 부탁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 자신의 꿈을 가다듬어서, 정말 살아있는 강준경씨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건 제 능력 밖에 있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 증인은 자신을 ‘강간했다’ 라고 주장한 남편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증인과 증인의 아드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남편분의 시신이나, 그 시신이 흘렸다는 흙탕물, 시신이 깨부셨다는 창문의 유리조각을 발견한 바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드님은 이전 증언을 번복해서 말씀하신 거고요.
- 저는 아들의 얼굴까지 본 후로 기절했습니다. 제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은 잘게 토막내어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에 버리고, 방은 제가 일어나기 전에 깨끗이 정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깨진 유리창은 그대로 뒀습니다. 이 부분은 김기준씨가 꿈으로 조작한 것 같습니다.
- 증인의 아드님은 이 모든 사건이 아버지, 그러니까 증인의 남편 되시는 분이 증인에게 한을 품고 죽어서, 그 원혼이 장난을 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제 아들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오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나이대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품기 쉬운 오해일 뿐이죠.
- 증인은 그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기준씨에게 연락을 취해서,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핑계로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다음 흉기로 수차례 찔러서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상대로 수차례 최면을 시도했습니다. 맞습니까?
- 맞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죽어서도 꿈을 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죽고 나서 꿈을 꾸는 꿈을 꾸었을 수도 있죠. 어디까지 예비해 두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끝입니다. 현실은 잘 보존될 테고, 제가 저지른 일들은 제가 다 책임지는 걸로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증인, 증인의 증언들이 법정 증거로 채택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나요?
- 짐작하고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해도 좋습니다.
- 얼마 전에 제 아들과 변호사에게 부탁해서 김기준씨의 무덤을 파헤쳐보도록 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시신이 한 구인지, 두 구인지, 그리고 그 시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신다면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아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끝입니까?
- 끝입니다.
- 알겠습니다. 판사님, 심문을 마치겠습니다.
(2010.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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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새소설이군..
독특한데, 꿈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능력자라.
다음편엔 라쇼몽처럼 기준과 준경의 입장에서 연작으로 써보는건 어때?

